1920년 간도참변 실태와 특징 – 일본군이 작성한 사상자 보고서 분석을 중심으로 –
Facts and Features of the Kando Massacre in 1920 – Based on <Survey of casualties of Chinese and Kore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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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군사령부에서 작성한 간도참변 관련 사상자수 내부 보고서인 <間島事件に依る鮮支人死傷者調査の件>(아시아역사자료센터(JACAR),청구기호 C06031228700)를 토대로 여전히 내용적 ‘분석’은 미흡한 기존 선행연구의 동향에 착목함으로써 일본군의 연대별 움직임과 사건 발생 순으로 데이터를 재배열하여 분석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주요 결론은 무엇일까? 첫째, 명확한 교전을 통해 발생한 사상자의 수보다 철저하고 지속적인 ‘마을 수색’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교전 사례는 세 곳의 주요 지대 중 청산리 일대의 전투를 담당한 히가시 지대에서 비교적 많이 확인될 뿐, 이소바야시, 기무라 지대의 경우 수색에 의한 ‘성과’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즉, ‘출동’했으니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에 몰렸고, 독립군의 재출몰을 방지하기 위한 ‘근거지 박멸전’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수색의 장기화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전 중 ‘불가피한’ 군인 사상자의 발생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음을 일본군이 기록한 그들의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가능한 것이다. 본문에서 제시한 <표2> ‘학서동(鶴栖洞) 학살’ 사례에서 고연령의 비무장세력인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둘째, 일본군의 보고서나 기록상으로는 ‘초토 작전’은 11월 하순에는 종료하고 철수하는 것으로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표>의 구체적인 일자와 지역별 움직임을 보면 12월 하순까지도 각 지역 수비대와의 연계를 통해 ‘계속 잔류’하면서 수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군의 기록이 일본군의 ‘학살’ 행적을 아이러니컬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Abstract
This paper is based on the historical materials of <Survey of casualties of Chinese&Korean due to the Kando massacre> prepared by the Korean Army Command (JACAR, C06031228700). Focusing on it, we rearranged it in chronological order and tried to link the transition of casualties with the trends of each regiment. As a result of the examination, the following can be said. First, the majority of casualties were due to search rather than engagement. The number of casualties due to the engagement is only the case of the battle of Chungshanli-Orang Village-Kodong, which was in charge of the Higashi(東) Detachment, and in the case of Isobayashi(磯林)and Kimura(木村) Detachment, there are many cases of "earning a few" by searching. Occupied. In short, this leads to the deliberate massacre of unarmed civilians. In <Table 2>, the case of "Haksu-villlage" clearly shows the case of slaughtering an elderly unarmed group. Second, according to a Japanese military report, the subjugation operation was planned to end until late November. However, as is clear from the contents of the table presented in the text, there was no sign that the subjugation and search would end even in late December. It seems that it was trying to exterminate the base of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in cooperation with the river garrison scattered in each area, but from the materials created by the Japanese army, the lawless military including the slaughter without the plan and substance meshing It can be proved that the action was in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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