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초 송의 책봉 제의와 고려의 대응
Diplomatic Issue between Goryeo-Song relation in the Early 12th Century
0
조회
0
다운로드
26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송은 고려와의 국교 재개(1071) 이후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책봉과 관련한 문제를 거론하였는데, 모두 휘종의 재위 기간 중이었다. 송은 숙종과 예종 때인 1103, 1110년에 각각 책봉 문제를 제기하였다. 1, 2차 책봉 제의는 거란이 강력하게 존재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거란이 고려의 책봉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책봉에 대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3차 제의는 거란(요)이 여진(금)에 의해 급격히 기울어가던 1123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거란과의 관계를 끊고 송의 책봉을 받을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려는 1103년에 송이 처음 제기한 책봉 제안에는 거란(요)의 책봉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하지만 1110년에 송이 정식 책봉을 대신하여 ‘權字’를 생략하고 고려의 국왕을 ‘眞王’의 예로 대하는 ‘책봉이 아닌 책봉관계’를 제시하자, 고려는 이를 수용하였다. 거란(요)을 의식하면서 외교적, 군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부분을 회피하면서 정식 책봉을 배제한 채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고려-송 양국은 합의한 셈이다. 이후 1115년에 여진이 금을 건국을 하면서 송은 여진(금)과의 연계를 통해 거란(요)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자 하면서 고려에도 적극적으로 책봉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1123년의 3차 책봉 제안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12세기 초부터 여진의 성장을 지켜본 고려는 지속적으로 송에 여진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의 위험을 경고해 왔다. 이 같은 정세 인식 속에서 고려는 1123년에 송이 책봉을 제의해 오자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완곡히 거부하면서 사세를 관망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결과적으로 1123년부터 송은 여진(금)에 군사적 수세에 몰리면서 끝내 1127년에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의 조심스런 외교적 행보가 옳았음을 보여준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examine Goryeo’s diplomatic movements amid East Asia’s international circumstances. Hui-tsung(徽宗), the emperor of the Song(宋) China, was implementing aggressive foreign policies in order to attack the Khitan Liao(遼) and accordingly, mentioned installation three times to Goryeo. Propositions of the first and second installations in 1103 and 1110, respectively, were made when the Khitan’s power was strong and they were the results of recognizing the reality the Khitan was Goryeo’s suzerain state while expressing willingness for installation. The third round of proposition was made in 1123 when the Khitan was rapidly being collapsed by the Jurchen Jin(金), clearly shows that Goyreo would sever relationship with the Khitan Liao and receive asking installation of the Song. Goryeo rejected the Song’s first round of proposition in 1103 for a realistic reason of the risk of war with the Khitan Liao. However, when the Song presented a relationship of “fictitious installation, which was not real installation”, in 1110 that Goryeo’s king would be treated as an installed king even though Goryeo recognized the Khitan Liao’s suzerainty and the Song officially did not install Goryeo’s King, Goryeo accepted this. The two countries agreed that they would avoid a threat in diplomatic and military terms conscious of the Khitan Liao and maintained ambiguous diplomatic relations. Thereafter as the Jurchens built Jin(金) in 1115, the Song implemented more aggressive policies to militarily suppress the Khitan Liao and in 1123 denied the Khitan Liao’s suzerainty and made more active proposition that the Song would be its suzerain state. However, Goryeo which watched the growth of the Jurchens from the early 12th century, continuously warned that it was dangerous for the Song to have clos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Jurchen Jin. Amid such perception of circumstances, Goryeo in 1123 did not accept the Song’s proposition for installation and denied it gracefully, taking an attitude of waiting and seeing circumstances. Resultantly, the Song was placed on the defensive by the Jurchen Jin from 1123 and collapsed in 1127. It shows that Goryeo’s careful diplomatic move was proper.
참고문헌 (45)
- "高麗史"[URL]
- "高麗史節要"[URL]
- 校勘標點, "宋史" (1977), 中華書局
- 校勘標點, "遼史" (1974), 中華書局
- 校勘標點, "金史" (1995), 中華書局
- "建炎以來繫年要錄", 文淵閣本四庫全書 電子版, ~
- "三朝北盟會編", 文淵閣本四庫全書 電子版, ~
- "宋史全文", 文淵閣本四庫全書 電子版, ~
- "宋名臣奏議", 文淵閣本四庫全書 電子版, ~
- "高麗圖經"[URL]
- 李燾, "續資治通鑑長編" (1995), 中華書局
- 陳邦瞻, "宋史紀事本末" (1977), 中華書局
- 김규록, "고려중기의 宋 使節 迎送과 伴使의 운용", 역사교육, (134), pp.155~187 (2015), 역사교육연구회
- 김난옥, "이방인이 본 우리" (2009), 국사편찬위원회
- 金庠基, "丹寇와의 抗爭", 국사상의 제문제, 2 (1959), 國史編纂委員會
- 金庠基, "고려와 金ㆍ宋과의 관계", 국사상의 제문제, 5 (1959), 國史編纂委員
- 김성규, "3개의 ‘트라이앵글’ : 北宋時代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大勢와 그 특징에 관한 試論", 역사학보, (205), pp.221~253 (2010), 역사학회
- 김철웅, "高麗와 宋의 海上交易路와 交易港", 중국사연구, (28), pp.101~124 (2004), 중국사학회
- 朴龍雲, "高麗ㆍ宋 交聘의 목적과 使節에 대한 考察(上)ㆍ(下)", 韓國學報, 81ㆍ82 (1995), 一志社
- 朴志焄, "宋代 異民族 國家에 對한 認識", 역사문화연구, 12 (2000), 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 박지훈, "宋代 士大夫의 高麗觀", 이화사학연구, (30), pp.561~584 (2003), 이화사학연구소
- 박지훈, "송요 간의 전쟁과 和議 - 澶淵의 전역과 맹약을 중심으로 -", 동북아역사논총, (34), pp.95~130 (2011), 동북아역사재단
- 朴漢男,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上)" (1992), 探究堂
- 신채식, "宋代對外關係史硏究" (2008), 한국학술정보
- 沈載錫, "고려시대 송에 의한 국왕책봉의 전개", 淸溪史學, 12 (2002), 淸溪史學會
- 안병우, "고려와 송의 상호인식과 교섭-11세기 후반~12세기 전반", 역사와 현실, 43 (2002), 한국역사연구회
- 육정임, "고려·거란 ‘30년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 동북아역사논총, (34), pp.11~52 (2011), 동북아역사재단
- 이미지, "고려시기 對거란 외교의 전개와 특징", 박사, 한국사학과, pp.2012
- 이미지, "13세기 초 고려의 국제 환경 변화와 생애 기록-고려 墓誌를 중심으로", 韓國史學報, (55), pp.81~115 (2014), 고려사학회
- 李範鶴, "蘇軾의 高麗排斥論과 그 背景", 한국학논총, 15 (1992),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 이석현, "宋 高麗의 外交交涉과 認識, 對應 - 北宋末 南宋初를 중심으로 -", 중국사연구, (39), pp.119~158 (2005), 중국사학회
- 이석현,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2010), 동북아역사재단
- 李龍範, "高麗와 契丹과의 關係", 東洋學, 7 (1977),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 장동익, "高麗時代에 이루어졌던 對外政策의 諸類型", 한국중세사연구, (42), pp.47~98 (2015), 한국중세사학회
- 全海宗, "韓中朝貢關係考-韓中關係史의 鳥瞰을 위한 導論", 東洋史學 硏究, 1 (1966)
- 全海宗, "高麗와 宋과의 關係", 東洋學, 7 (1977),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 鄭修芽, "尹瓘勢力의 形成-尹瓘의 女眞征伐과 관련된 몇 가지 問題의 檢討를 중심으로", 震檀學報, 66 (1988), 震檀學會
- 鄭修芽,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上)" (1992), 探究堂
- 鄭修芽, "高麗中期 對宋外交의 再開와 그 意義-北宋 改革政治의 수용을중심으로", 國史館論叢, 61 (1995), 國史編纂委員會
- 조복현, "12世紀 初期 高麗―金 關係의 전개와 상호 인식", 중국학보, (61), pp.243~268 (2010), 한국중국학회
- 조복현, "12세기 초 국제 정세와 麗金 간의 전쟁과 외교", 동북아역사논총, (34), pp.53~93 (2011), 동북아역사재단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선 보존과 복원, 그 20년사",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2004)
- 신안선 보존ㆍ복원 보고서,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2004)
- 近藤一成, "文人官僚蘇軾の對高麗政策", 史淵, 23 (2001), 九州大學 文學部
- 張春輝, "中国機械工程发明史 : 第二编" (2004), 淸華大學出版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