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한양방어체제의 논의와 군사제도 운영의 실상
Discussion on the Hanyang(漢陽) defense system and the status of the operation of the military policy in the early Chosu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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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기존의 거시적 입장에서 조선 전기에는 한양의 방어 체제가 제대로 구축되지 못했다는 평가에 대해 일단 그 구체적 실상을 파악하고 의미를 되새기고자 시도했다. 태조 3년 한양으로 천도한 뒤부터 본격적인 방어 체제의 구축 작업이 추진되었다. 무장 출신인 태조는 핵심 방어 시설인 성곽 축조를 주관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인력 동원에 따른 부담 등으로 시설면에서 취약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이를 보완하고자 수비 병력의 운영과 방위 계획의 수립 등과 관련해서 개국공신인 정도전 등이 여러 조치를 베풀었다. 주로 병제 개혁 등을 통해 미약한 부분을 보강하였다. 이들은 역할 분담과 상호 협력을 통해 굳건한 방어 체제의 수립에 힘썼다. 정변을 통해 즉위하기에 이른 태종은 개성에서 한양으로의 환도를 계기로 종전과 다른 각도에서 방어 체제를 정비했다. 외적으로 정치 군사 협력을 강화시킨 명과의 관계를 원활히 유지하고, 특히 내적으로는 어수선한 틈을 타고 돌발할지도 모르는 반대 세력의 제압을 위해 국왕을 정점으로 피라미드 형태와 같은 군 퉁솔 체계를 확립하였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 민생 안정 등의 이유로 도성 건설 같은 대규모 인력 사업은 재위 기간 중 유보시켰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 발생을 염두에 두어야 하므로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즉위하는 것을 계기로 도성 수축과 일장산성 등의 피난성이 축조되었다. 더불어 중앙군도 확장시켰다. 도성의 순찰과 감시를 담당할 병종도 정했다. 이렇게 구축된 체제는 후대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천도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대내외에 걸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토목보의 변이 일어난 뒤 북방의 불안이 점증되면서 문종 때 보다 적극적인 무비책이 강구되었다. 이는 한양 방어에도 반영되었다. 도성 시설의 보수로 방어력이 보강되면서 援城 설정 등의 대책도 강구되었다. 여기에 5사제로의 개편을 통한 병력의 적절한 운용이 첨가되었다. 火車라는 최신 무기를 개발도 포함되었다. 경비 병력의 확충을 위해 거주민을 활용하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다.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 것은 정변을 겪으며 집권했던 세조대였다. 양성지의 사보론 같은 능동적 방위책이 제시되었으나 거대 인력의 동원에 의한 성곽의 수축은 곤란했으므로 병력 확장과 통제력 강화 등을 통해 방어력을 높이는 것에 집중했다. 5위제로의 개편과 함께 경비 병력으로 거주민들로 편성되는 잡색군을 조직, 동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밀어부쳤다는 주장에 힘입어 성종대에 이르러 크게 후퇴하거나 폐지되었다.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체제를 마련하지 못하고 고식적인 대책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사회 변화, 특히 상대적으로 한양의 그것이 복잡하면서도 빨랐기 때문에 기존의 방식이나 제도로 대응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혁신적인 방안이 요구되었으나 당시 상황에서는 힘들었으며 다른 부문과의 균형도 고려해야 하므로 실행이 곤란했다.
Abstract
Ever since A.D. 1396, construction of a fortress for the new capitol, Hanyang, has started. The construction was led by a military officer named King Taejo(太祖). However, in terms of defensive facility, it had its weak points. Accordingly, in order to relieve the issues of lacking defensive ability, founding contributors such as Jung Do-Jeon(鄭道傳) took the lead. They implemented a military innovation and strengthened the central army and tried their best in defending the new capitol and guarding the fortress. However, due to issues in the succession of the throne, the uprising of the Prince revolted and the whole country went into chaos. Due to the uprising, the capitol was moved to Kaesung(開城) in 1399. Taejong(太宗) who ascended to the 3rd king moved the capitol to Hanyang once again. Based on such change, they restructured the defense system centering on a totally different political standpoint. However, due to issues of the poor lives of the citizens, there were no major construction such as building a fortress. At last, as King Taejong was dethroned and King Sejong(世宗) became the king, the construction of the fortress for Hanyang was reactivated. Also, he constructed a castle that could be used as an evacuation shelter during emergency near Hanyang. Additionally, the central army that defended the capitol was expanded. A Military branch was newly established to guard and monitor the fortress. The newly established defense system of Hanyang has affected the future generations. King Munjong(文宗) and King Sejo(世祖) who succeeded King Sejong, aggressively strengthened the military defense ability. Based on such state, the Hanyang defense system was altered. First, they repaired the fortress and upgraded their defense ability. Furthermore, they increased the military resource and restructured the order and control system. However, a sudden strengthening of the military ability rendered big burdens to the citizen. They needed to strengthening the defense of Hanyang and also relieve the burden of the citizen at the same time. This was done by King Sungjong(成宗) during his regime. However, he wasn’t able to bring up an innovative policy and followed traditional policies. As a result, the defense ability weake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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