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8년 고구려 멸망시 蛇川原戰의 재구성 및 의의
The Reconstruction and assessment of Sachunwonbattle(蛇川原戰) at the Fall of Koguryo in A.D.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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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7월 문무왕은 대성산기슭에 주둔하던 당군과 합류하기 위해 한성주에서 주력군을 북진시켰다. 이에 고구려는 蛇川之原에서 신라군을 막으며 소위 사천원전이 벌어졌다. 신라 장군 문영 등이 고구려병을 대파하고, 9월 21일 나당 양군이 사수에서 합류했다. 이에 연남건은 평양성 인근의 사수에서 항거했지만 패배하고 직후 평양성이 함락되며 고구려는 망했다. 668년 평양성 인근의 사수전은 662년 방효태부대가 전멸당한 사수전과 동일 장소에서 벌어진 전투로 사수는 평양성과 대성산성 사이에 남북으로 흐르는 합장강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668년의 사천원전을 평양성 인근의 사수전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신라군이 668년 7~8월중 사천원에서 고구려병을 격파한 후 평양성 인근 사수에서 9월 중순 당군과 합세하여 사수전을 치른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수와 사천원은 다른 지역이며, 668년의 사천원전과 사수전은 구별되어야 한다. 사천원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사천+원의 지리적 특성을 가졌다. 당시 고구려는 방어에 유리하게 강을 전면에 두고 그 후면의 평원에 대군을 배치해 신라군을 막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과 한성주에서 평양으로의 북진로를 감안하면, 사천원은 서흥강의 중하류에서 사리원 일대까지의 강과 평야가 연속된 지역에 비정된다. 사천원전은 백제 멸망시 가장 유명한 전투인 황산벌전과 매우 유사한 정치적 군사적 상황 하에 전개되었다. 왕성이 당의 침략에 의해 위태로운 와중에 백제나 고구려 모두 당군과 합류하기 위해 진격하던 신라군을 막아섰다. 이를 위해 지리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골라 군사를 배치하고 오로지 방어에 나섰다. 당시 백척간두의 궁지에 몰린 양국이 나당군의 합류를 막고자 한 의도는 분명히 목적-당과의 협상 시간 확보, 나당간의 불화 유도, 그리고 645년 안시성 회군 내지 662년 평양성 회군 등의 재연 기대 등-한 바가 있었지만 실패하며 국가가 멸망하게 된다.
Abstract
668年7月、文武王は嬰留山の下にいる唐軍と合流するために漢城州から主力軍を北進させた。故に高句麗が蛇川之原で新羅軍を遮っていわゆる蛇川原戰が起った。当時新羅の將軍の文潁等が高句麗の兵を大破して、9月21日に羅唐兩軍が蛇水で合流した。淵男建は平壤城近辺の蛇水で抗拒したが敗北した直後に平壤城が陷落して高句麗は滅亡した。668年の平壤城近辺の蛇水戰は662年、龐孝泰部隊が全滅された蛇水戰と同じ場所で起った戰鬪として蛇水は平壤城と大成山城の間を南北に流れる合掌江に比定される。ところが學界は668年の蛇川原戰を平壤城近辺の蛇水戰と同一視する。しかしこのような見解は新羅軍が668年の7~8月の中蛇川原で高句麗兵を擊破した後平壤城近辺の蛇水で、9月中旬に唐と合流して蛇水で戦った狀況を順理的に說明できない。この故に蛇川原と蛇水は違う地域であり、668年の蛇川原戰と蛇水戰は區別されるべきである。蛇川原は名稱からわかるように川+原の地理的な特性を持つ。当時、高句麗は防御に有利な江を全面においてその後面の平原に大軍を配置して新羅軍を防ごうとした。このような狀況と漢城州から平壤への北進路を考慮すれば蛇川原は瑞興江の中下流から沙里院一帶までの江と平野が続く地域に比定される。この蛇川原戰は百濟の滅亡時にいちばん有名な戰鬪であった黃山伐戰と非常に類似した政治的、軍事的狀況で展開された。王城が唐の侵略に危うい状況で百濟と高句麗両方とも唐軍と合流するために進擊する新羅軍を立ち塞がった。このために地理的に有利な地域を選んで防禦線を設定してひたすら防禦に進み出た。当時百尺竿頭の窮地に追い出された兩國が羅唐軍の合流を遮ろうとした意圖は確かに目的-唐との協商の時間確保、羅唐間の不和誘導、そして645年安市城の回軍ないし662年の平壤城回軍などの再演の期待など-があったからであるが、失敗して國家が滅亡す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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