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The War Situation of the Goguryeo-Táng War in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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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에 대해 분석하였다. 661년 당은 35만 명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요동·압록수·평양 세 방면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대한 고구려의 방어 전략은 1. 요동방어망과 평양성에서 수성전을 전개, 2. 압록수에서 당군의 보급로를 차단, 3. 거란 등의 서북방에 소재한 유목세력들과 연계하여 당을 압박, 4. 당군이 군량 부족과 추위로 인해 지쳤을 때를 기다리다가 공세로 전환, 5. 퇴각하는 당군을 추격 및 섬멸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요동 방면에서는 정명진군이 신성 일대를 공략하였으나, 고구려군은 신성을 사수하여 당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압록수 방면에서는 글필하력군 등이 압록수 이북에 보급기지를 확보하고자 하였으나, 압록수 이남에 배치된 남생군에게 저지되었다. 그러나 압록수가 결빙되자, 글필하력군은 압록수를 건너 남생군을 격파하였다. 평양 방면에서는 소정방군 등의 수군이 패강으로 진입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 포위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소정방군 등은 보급을 맡았던 글필하력군이 남생군에게 저지되고 있는 사이 보급이 끊기면서 고구려군의 저항에 고전하였다. 소정방은 이를 타개하고자, 신라에 보급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초원의 유목세력인 철륵이 당의 변경을 공격하고, 고구려에 포섭된 거란이 참전하였다. 결국 요동 방면을 공격하던 아사나충‧소사업군과 압록수 방면을 공격하던 글필하력군이 철륵‧거란 전선으로 철군하게 되었다. 이에 요동 방면의 고구려군은 공세로 전환하여 요동에 잔류한 정명진군을 공격하였다. 평양 방면에서도 고구려군의 반격은 더욱 거세져 당의 진지 2개를 빼앗고 왜에 사신을 보내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에 소정방군은 한파 속에서 고구려군의 반격을 방어하면서 신라의 보급을 기다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Abstract
This paper analyzes the battle situation of the Goguryeo-Táng War in 661. In 661, 350,000 Táng troops attacked Liaodong, Yalu River, and Pyongyang. Goguryeo's defense strategies were to block the supply routes of the Yalu River while guarding the castle with a Liaodong defense net, press the party in connection with nomadic forces in the northwest, wait for the party's lack of food, and turning into an offensive phase. On the Liaodong front, Chéngmíngzhèn's army(Nubang attacking army) fought against Go Eul-deok's army outside and captured Go Eul-deok, but Goguryeo's army succeeded in protecting the divinity and stopping the party's advance. On the Yalu River front, Qì bì hé lì's army(Liáodōng attacking army) tried to secure a supply base north of the Yalu River, but was previously blocked by tens of thousands of Namsaeng's army troops deployed south of the Yalu River. However, when the Yalu River suddenly froze, Qì bì hé lì's army crossed the Yalu River, defeated Namsaeng's army, and chased Cheolsan. On the Pyongyang front, party naval forces led by Sūdìngfāng(Pyongyang attacking army), Rèn yǎ xiāng(Paegang attacking army), and Páng xiàotài(Okjeo attacking army) defeated Goguryeo naval forces at the mouth of the Pae River and succeeded in siege Pyongyang. However, while Sūdìngfāng's army in charge of Pyongyang supplies were blocked by Namsaeng's army, the supplies were cut off and failed to maintain the momentum and struggled with Goguryeo's resistance. In addition, the Silla army, which was advancing to Goguryeo, was unable to advance to Goguryeo due to the Baekje Revival Army. Sūdìngfāng asked Silla to supply it to overcome these difficulties. In this situation, Qìdān, which was linked to the nomadic forces of the meadow, Töles and Goguryeo, rebelled against the party. As a result, the Ā shǐ nà zhōng and Xiāosìyè forces that attacked the fluctuation and the Qì bì hé lì forces that attacked the Yalu River retreated toward Töles, making the party more disadvantageous. When the Táng army began to withdraw to the Töles front, the Liaodong Goguryeo army switched to an offensive and launched a counterattack, and in the process, Chéngmíngzhèn, who remained in Liaodong, lost. In Pyongyang, Goguryeo's counterattack intensified, and it achieved certain results in stealing two military bases of the party and sending envoys to Japan to break through the party's siege. On the other hand, the party faced the worst situation of having to wait for the supply of Silla while defending Goguryeo's counterattack in cold we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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