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친국(親鞫) 확대와 추국 운영의 개편
The Expansion of Chinguk(親鞫) and the Reorganization of Chuguk(推鞫) in th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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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추국은 역모 사건을 처분하는 국가의 중요한 재판 절차 중 하나였다. 숙종 대까지는 국왕이 직접 추국장에 참석하여 재판을 통솔하는 친림추국 방식이 국왕 전제권을 발현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졌고, 대부분의 추국은 궐정추국·금부추국과 같은 ‘위관 위임 추국’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영조 4년(1728) 무신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하였다. 무신란 초기 위급 상황에서 절반 이상의 추국이 친림추국으로 이뤄졌고, 이를 통해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친림추국의 확대는 무신란을 통제하고 제어하는데 효과적인 비상대책으로 작동하였다. 그러나 무신란의 후속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재발하는 가운데 이에 대한 대응방식으로서 친림추국의 활용이 빈번해지고 있었다. 영조 6년(1730) 경술역옥, 영조 14년(1738) 양시박 추국을 거치며 친림추국의 비중은 증가하였고, 영조 31년(1755) 을해옥사를 기점으로 대부분의 추국은 친림추국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친림추국의 확대가 준법 추국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국왕은 법률을 초월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영조 역시 친림추국 과정에도 ‘결안생략 처형’을 주도하며 절차적 정당성을 위배하고 있었다. 결국 친림추국은 무신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신속하게 수습하기 위한 비상수단이었으나, 점차 국왕의 전제적 사법권 행사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정조는 즉위 초기 영조 시대의 국왕 주도 친림추국 방식이 야기한 폐해를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이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중대한 역모 사건의 경우 초기에는 친림추국을 통해 사건의 핵심을 파악한 후, 위관에게 사건 처리를 위임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국왕과 신하가 협력하여 추국을 진행함으로써 국왕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억제하고 법률에 의거한 형정 절차를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 정조 대에는 공식 절차를 거쳐 사형 판결이 이루어졌으며, 영조 대에 문제가 되었던 결안생략 처형과 같은 초법적 처형이 근절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조선후기 추국 운영은 17세기 ‘위관 위임 추국’ 기조에서 18세기 중반 영조 대 ‘국왕 친림추국’ 기조로 변화하였고, 18세기 후반 정조 대에 이르면 ‘국왕·위관 종합 추국’ 방식으로 정착하면서 국왕과 신료의 협력적 관계로 재편될 수 있었다.
Abstract
Chuguk(推鞫) was an important legal procedure for dealing with treason cases in the Joseon Dynasty. Until the reign of King Sukjong(肅宗), chillim-chuguk(親臨推鞫), in which the king personally presided over trials, was seen as compromising judicial fairness. Instead, most interrogations were conducted by Gwoljeong-chuguk(闕庭推鞫) or Geumbu-chuguk(禁府推鞫), led by Wigwan(委官). During the Musin rebellion(戊申亂, 1728) in the 4th year of King Yeongjo’s(英祖) reign, the need for quick decisions led to an increase in chillim-chuguk. Over time it became institutionalised, and by the Eulhae Oksa(乙亥獄事, 1755) most interrogations followed this format rather than Gwoljeong-chuguk or Geumbu-chuguk. Although chillim-chuguk allowed for quick resolutions, it also allowed King Yeongjo to override judicial procedures, often carrying out executions without a finalized judgment decree(結案省略處刑). What began as an emergency measure became an instrument of absolute judicial control. King Jeongjo(正祖) attempted to reform this system, initially using Chillim- chuguk for major treason cases, but later delegating trials to Gwoljeong-chuguk and Geumbu-chuguk, thus restoring judicial balance. His reforms reduced arbitrary royal authority and ensured that capital punishment followed legal procedures. In summary, Chuguk evolved from delegated interrogation(委官委任推鞫) in the 17th century to Chillim-chuguk under King Yeongjo. In the late 18th century, King Jeongjo established a combined system of Gwoljeong-chuguk and Geumbu-chuguk, moving towards a more balanced judicia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