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후보

율곡의 孝 사상과 평생을 통해 실천한 인성 교육적 인간상

Yulgok’s Thought of Filial Piety and His Life-long Task for the Personality Education Model

0

조회

0

다운로드

3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주제분류한국어와문학

초록

율곡(1536-1584)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조선조 중종31년(1536) 12월 26일에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보물165)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기 그지없어서 천재성이 이미 드러났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효성스럽기 그지없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바탕을 타고 난 점이다. 사임당 신씨가 태몽에서 龍을 보고서 태기(胎氣)가 있어서 자식을 낳았다고 하여 어렸을 적에 이름을 이현룡(李見龍)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540년 그가 다섯 살 때에 모친인 사임당이 병이 들어 중태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각방으로 구명을 하려 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당황 중에 어린 현룡이마저 간곳이 없어서 온 가족들이 더욱 불안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종일 찾다가 겨우 저녁때에 찾고 보니 후원의 외조부의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서 모친의 쾌유를 정성껏 빌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의 결심은 누구도 권고나 암시를 준 일이 아니니 그의 판단력과 효심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강보의 효자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아홉 살 때는 이륜행실도를 읽게 되었는데 당(唐)의 장공예(張公藝)가 구세동거(九世同居)했다는 내용을 읽고서 감탄하고서 자신도 성장하면 반드시 부모형제가 함께 살겠다고 맹세하고서 부모형제동거도(父母兄弟同居圖)를 그려 놓기도 하였다. 열한 살 때는 부친의 병(病)이 위중하여 위독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때에 묘방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에 또다시 외조부의 사당에 남몰래 들어가서 신(神)에게 빌기를 아버지 목숨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대신 죽겠다고 간곡히 간청하였다. 지극한 정성에 감복한 신령이 나타나서 위로해주고서 부친인 이원수에게 말하기를 “장한 아들을 두었소, 이 아이는 장차 조선의 대유학자가 될 것이니 잘 키우시오”하고는 조건으로 내일 아침에 날이 밝게 되거든 이이(李珥)로 성명을 고치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대로 실행했더니 부친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13세 때에 진사초시에 장원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대망(大望)이 열리는 예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의 모친이면서 한편으로 스승이었던 사임당이 돌연히 별세하여 슬픔을 머금고 효성을 다하여 주자가례에 따라 상례, 장례와 3년 시묘(侍墓)살이를 극진히 하여 모든 이의 전범이 되었다. 모상(母喪)을 마친 율곡은 19세에 금강산에 철학적 동기로 입산하여 모친의 죽음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철학적 사고로 불서(佛書)를 많이 탐독하고 여러 스님들과 무한한 대화 끝에 불교는 윤리성과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하산하여 다시 유교로 돌아왔다. 율곡은 아들이 없는 외조모에게 직장을 유기하면서까지 효성을 지극히 하였다. 41세 때는 황해도 해주에 가서 청계당을 크게 짓고 100여명의 식솔과 함께 모여 동거계사(同居誡辭)를 지어 효가 중심축이 되는 내용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가정관과 교육관을 세워 놓고 실행했다. 이는 자기 가정보다도 그 시대의 무너져가는 가정교육공동문화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시대의 중요과제라고 판단하고 국민들을 각성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42세 때는 청소년교육을 위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는데 역시 효가 아주 중시되었다. 47세 때(선조10년)는 왕명으로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는데 역시 효를 강조하고 교사(敎師)의 교육관을 중시하여 강조하였다. 요컨대, 율곡은 유아교육, 청소년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부모교육 군왕의 교육을 함께 중시한 세계적인 전민(全民)교육사상가였다. 그런데 육곡은 효를 통한 충(忠)도 중시하여 국가관이 확고하였음은 그의 국방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연구자가 생각하건대 현대교육이 위기에 직면하여 인성교육이 과제인데 율곡은 이미 그 시대에 이를 강조한바 우리의 현대교육방향도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여 국가정책으로 책정하여 국정과제로 하는 것이 국가의 흥운(興運)을 좌우하는 관건이라 하겠다. 따라서 국회의장의 인성교육추진법의 제정은 시의적절하다고 극찬하고 싶다.

Abstract

Yulgok(1536-1584) was born in December 26 (Jungjong’s 31st reign year) at Ojukheon(national Treasure #165), Jukheon-dong, Gangreung-si, Gangwon Province during the Joseon dynasty. Although he was a genius with intelligence as a young boy, but the most important nature was born with excellent moralistic and humanistic nature with filial piety. While he was a kid, he was called with his name Yi Hyeonryong since his mother Sin Saimdang had a birth dream of dragon. In 1540, when he was 5 years old, his mother was seriously sick and there seemed like no cure. Family tried to find him but they could not find him anywhere. Finally, when family found him, he was praying at the shrine of grandfather for his mother to overcome the sickness. Nobody tell him, but he did it from his decision and filial piety made people deeply moved and called him a men of filial piety of the region. At nine, he read “Diagram of the Two Moral Behaviors” he was touched with the story of Jang Gongye’s story of living with 9 generations. As a result he decided to live with his parents and brothers together by painting diagram of living with all family members. At eleven, his father got seriously sick, he went the grandfather’s shrine and asked for his father’s recovery giving up his life as an exchange. In his father’s dream, a diety came and told him that you have a great son and he will be a excellent neo-Confucian scholar. Diety told his father Yi Won-su to change his son’s name to Yi I. After change the name, his father got over the sickness. At thirteen, he passed the first level civil exam with top score, but his mother suddenly died. He payed respect for his mother with 3 years of morning based on Confucian ethical code. After that when he was 19, he went to Geumgang mountain and study Buddhism to overcome his sorrow and return home and study Confucianism again. Whe he came back he took care of his grandmother of mother-side who did not have son. At 41, he moved to Haeju, Hwanghae Province and built Cheonggyedang to live with family of 100. The community was set up for proper family and education concepts based on the filial piety. This aimed to enlighten people rather than taking care of his own family. At 42, he wrote “Gyeokmongyogyeol” to emphasize the filial piety for the education of youths. At 47, he established a Model School by the King’s order. It was also emphasized the filial piety and valued the views on education of the teachers. He was a top level educator and thinkers for all people emphasizing kids, youths, school, social and parental educations as well as education for the rulers. He also emphasized the value of patriotism to establish sound thoughts of state and security. As a researcher, contemporary education faces the crisis and personality education becomes the important issue. Yulgok already realized this problem. This is why comtemporary education adopt his thought as a national task. It is the cornerstone of the development of the nation.

참고문헌 (24)

  1. "論語", ~
  2. "孟子", ~
  3. "大學", ~
  4. "中庸", ~
  5. "小學", ~
  6. "二倫行實圖", ~
  7. "栗谷全書", ~
  8. 김경탁, "율곡의 연구" (1960), 한국연구도서관
  9. 이병도, "이이-율곡의 생애와 사상" (1973), 서문당
  10. 이종술, "퇴계 율곡의 철학사상비교연구" (1974), 수덕문화사
  11. 김익수, "율곡선생의 교육철학" (1997), 수덕문화사
  12. 김익수, "율곡철학과 현대사회" (1998), 수덕문화사
  13. 김익수, "21세기 새 문화창조와 율곡학" (2001), 수덕문화사
  14. 김익수, "율곡의 청소년교육문화" (2002), 수덕문화사
  15. 김익수, "동방의 인효(仁孝)사상형성과 공자의 계승" (2013), 사단법인 서울특별시교육의정회
  16. 김익수, "우리 고유의 國學을 계승한 공자의 효사상과 인성교육의 정향(Ⅰ)", 한국사상과 문화, (74), pp.197~232 (2014), 한국사상문화학회
  17. 김익수, "율곡(栗谷)의 인성교육론(人性敎育論)(1)— 주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중심으로 —", 한국사상과 문화, (73), pp.195~222 (2014), 한국사상문화학회
  18. 김익수, "율곡 동거계사의 윤리교육관연구", 한국사상사학, 4-5 (1993), 한구사상사학회
  19. 도광순, "율곡선생의 교육사상", 교욱철학, (4) (1980)
  20. 한기언, "율곡 이이의 교육이념", 교육학연구, 12(2) (1974)
  21. 손인수, "율곡교육사상의 입지(立志)와 성론(誠論)", ~ (1974)
  22. 김경호, "학교모범에 나타난 율곡의 교육사상", 율곡사상연구, 6 (2003)
  23. 박의수, "율곡 이이의 교육사상", 한국사상과문화, 7 (2000)
  24. 최승순, "율곡의 교학사상연구", 율곡사상연구, 6 (1995)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13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