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계외혼제사회에서 주자가례의 수용에 의한 혼례의 지속과 변용
Continuation and variation of weddings by accommodating Confucian ritualism in a paternal exogamy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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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혼례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으며 고구려의 서옥(壻屋)에 관한 내용을 바탕으로 모편거주제(matrilocal residence)와 모계사회의 잔존문화로 이해하였다. 여기에는 Morgan의 『고대사회』의 영향을 받은 엥겔스의 이론이 중심에 있다. 여신을 믿는 신앙이나 신화 또는 여왕의 등장이나 왕가의 결혼을 근거로 한국의 고대사회가 모계사회의 영향이 있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의 연구성과로 가족집단은 민족에 따라 모계제(matrilineal)에서 부계제(patrilineal)로 진화된 것이 아니며 민족에 따라 쌍계제(dualism), 이중출자(double decent)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신앙이나 신화가 그 사회를 배경으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제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선행연구의 성과이다. 고대의 가족제도와 혼인제도는 결혼 후에 거처로 구분하기 보다는 자녀의 상속이나 출자(decent)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부계사회라 할 수 있으며 배우자를 친족 이외 또는 타 거주지의 사람과 혼인을 맺었다. 따라서 부계외혼제가 고대부터 가족제도나 결혼에 지배적인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외혼제는 자유연애와 달리 중매에 의해 결혼하기에 중매자도 있었음이 주몽설화에 반영되어 있다. 북방소수민족은 부계외혼제를 행하고 있으며 대부분 주거공간이 성에 따른 구분이 명확하여 앞과 뒤 또는 좌우로 나누어 남성공간과 여성공간으로 구분된다. 한국의 주거공간은 안채와 바깥채로 나누어져 있다. 4세기의 안악3호 고분을 보면 남녀유별에 의한 공간구분이 있다는 점에서 유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부계외혼제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결혼 후의 남귀여가(男歸女家)는 일정기간 처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기간이기도 했으며 고려시대까지 자녀균등상속의 관행과도 관련이 있다. 유교의 도입으로 조선조에 6례 또는 4례가 도입되며 이를 정착하는 문제가 되는 것은 친영의 절차였다. 친영은 실제 혼례를 치루는 의례와 신부와 신랑이 함께 시가로 가는 과정을 말한다. 유교의 절차로 친영은 신랑집에서 혼례를 치루고 시부모에게 인사를 드리는 의례이다. 그러나 유교이전의 남귀여가는 신부집에서 혼례를 하고 일 년이나 일정기간 후에 신부가 시가에서 후례를 올리는 절차이다. 친영(親迎)이 정착되지 않아 대안으로 반친영(半親迎)을 행하여 신부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시가에서 후례를 지냈다. 반친영이 정착여부는 귀족계층에서는 수용되었으나 민간에서는 남귀여가의 관행이 많았다. 따라서 민간에서 ‘해묵이’라 하여 이듬해에 신행을 하든지 또는 ‘달묵이’이라 하여 몇 달이 지난 후에 신행을 하였다. 주자가례의 도입으로 혼례에서 남자가 처가에서 거처하는 기간이 짧아짐에 따라 노동력의 보상은 사라지고 신부 집에 보내는 납폐(納幣)에 예물로 보상하게 되었다. 납폐는 신랑집단으로부터 처가에 보내는 재화나 증물의 총칭으로 혼자(婚資)에 해당되는 것이며, 납폐의 부담이 커진 것은 정신적 경제적 보상이 커진 것으로 유교 정착에 의해 부권이 강화되고 부인의 지위가 종속되어 주변적 존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Abstract
It is very rare to find recordings on ancient wedding customs. According to Seo-ok (壻屋) which was written in Goguryeo period (37 BCE–668 CE), it is understood that matrilocal residences were common. This is based on the theory of Friedrich Engels, who was influenced by Lewis H. Morgan and Morgan’s book, Ancient Society. Ancient Korea was considered a matriarchal society because beliefs or myths on female deities, presence of queens, royal wedding, etc. Thanks to anthropological research, it is well-known that family groups evolved by ethnic groups into dualistic and double-decent groups. In other words, ethnic groups were not a factor in dividing family groups into matrilineal or patrilineal types. Previous studies also found that beliefs or myths were not directly related with social systems. Family systems and marriage in ancient times were defined by descent or inheritance, not by residence styles of married couples. People tended to marry either from outside of relatives or from different area. Therefore, ancient countries in Korea were more patriarchal. Bugyewihonje (paternal exogamy, illegal for marriage between couples with the same surname and from same place of family origin) was a dominant practice. Lover marriages were uncommon as exogamy usually involved matchmakers, and their stories are found in Jumong-seolhwa, tales of the first king of Goguryeo. Northern minority groups also followed bugyewihonje. Most of their residential spaces were divided by gender, with anchae (inner space) for women and bakatchae (outer space) for men. Divided spaces were presented in Anak, a mural painting created in fourth century, well before Confucianism was introduced to the Korean peninsula, which means that paternal exogamy was dominant in Korea for quite some time. In the context of Confucian ritualism, chinyoung refers to the processes in wedding rituals and also means going to the husband’s house to greet parents-in-law on the wedding day. Whereas, namguiyeoga refers to the custom of married couples staying in the bride’s family house for a year (sometimes even longer) and then going to the husband’s house. Namguiyeoga was practiced before Confucianism was introduced. In the early stage of Confucianism, chinyoung was not well accepted, instead Banchinyoung (semi-chinyoung customs) was widely practiced in noble classes, whereas, commoners were more likely to practice namguiyeoga. Commoners usually stayed in the bride’s house after the wedding, where the husband provided labor until the couple moved to the husband’s house. However, with Confucian influences, the duration of the husband staying in the bride’s house decreased, leading to less labor being provided to the wife’s family; instead wedding presents were sent to the bride’s house in the form of nabpye (bride-wealth sent from the groom’s family to the bride’s family). Burden of nabpye increased as it became a larger part of replacing offers of labor. As a result, paternal authority strengthened and the status of wife became more subordinate to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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