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越境)하는 식민지 극장 : 다이글로시아와 리터러시 - 일제 말기 오영진의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The Colonial Korean Theaters Cross The Borders In The Greater East Asian Film Sphere - focused on Oh Young-jin’s screenplays in the early 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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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진의 「배뱅이굿」(1942)과 「맹진사댁 경사」(1943)는 한국 전래의 민속 및설화 소재를 바탕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시나리오다. 이러한 이유로 이작품들은 지금까지 한국의 민족정체성을 대표하는 한국 시나리오 문학의 정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일제 말기에 친일문학 잡지 『국민문학』에일본어로 발표된 시나리오 작품일 뿐만 아니라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오영진의 감독 데뷔작으로 영화화하기 위해 기획한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오영진은 조영 소속의 몇 안 되는 전문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당시에 끝내 영화로 제작, 상영되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러한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그 바탕에는 극작품과 극장의 문화정치학이 어떠한 방식으로 연동되고 있는지, 또 식민지 조선영화와 대동아영화권 신질서체제가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조선어와 일본어가 혼재하는 식민지 조선 극장의 다이글로시아적 상황에서 오영진은 일본어 대사를 선택하는 기민함을 보였으나 1942년 이후 대동아영화권신질서체제가 확고해짐에 따라 ‘조선영화’의 독자성이 의문시되는 상황임에도 여전히 당시 시국이 요구하는 영화의 요건을 감안하지 못하고 조선적 로컬리티를 강조하는 작품을 추구했다는 점이 오영진의 「배뱅이굿」과 「맹진사댁 경사」가 영화화 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결국 오영진은 조영의 기획에 작가로 참여한 작품 「우러르라 창공」(1943)과 「제트기 아래서」(1945)를 통해 자신의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 상영되는 성과를 얻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때 영화화의 기회를 얻게 된 작품들은 훗날 작가 자신에 의해 그 흔적이 지워져버리고 영화화 되지 못한 작품들은 한국의 민족정체성을 대표하는 한국 시나리오문학의 정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Abstract
Oh Young-jin successfully represented Korean national identity through motifs of Korean traditional folklores and folk tales in his screenplays 「The Exorcism Baebaengi」(1942) and 「The Wedding Day of the Maeng’s」(1943). For that reason, these screenplays were evaluated as Korean screenplay’s canons until now which represents Korean national identity. However, these screenplays were written in Japanese, and were published in Gukmin Munhak (National Literature) which was the most representative pro-Japanese literature journal in the colonial Korea. Moreover, Choseon Film Company, which was only pro-Japanese film company of colonial Korea designed those screenplays as Oh Young-jin’s debut film. Nevertheless, Oh Young-jin’s plan for filming his screenplays failed. This essay’s purpose is to investigate totally the reason which the plan for filming his screenplays ended in failure at that time. Colonial Korean theaters met diglossia situation from the early colonial period. Many colonial Korean film audience had Japanese literacy, and Oh Young-jin prefer Japanese in his writing because Japanese was regarded as the cultured language. Nevertheless, he didn’t sufficiently consider the condition of the Greater East Asian Film Sphere, he just pursued ‘Koreaness’, Korean locality in his screenplays. For these reasons, he didn’t have chance of filming his screenplays at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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