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신라 진흥왕대 가야 진출과 「창녕비」 -가야 방면 재지사회의 재편과 관련하여-

Expansion to Gaya and Changnyeong memorial stone in the reign of King Jinheung -Regarding re-organizing local elites’society in Gaya district-

1

조회

0

다운로드

2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진흥왕대 가야 방면과 관련하여 입석된 「창녕비」는 다른 진흥왕순수비와는 달리 성격과 목적에 있어 해석이 분분하다. 이는 비의 전반부가 상당수 마모되어 해석이 여의치 않고 비문의 내용이 교의 하사와 관련해서 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에는 「창녕비」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보다 가야 방면에 대한 신라의 진출에 있어 보조적인 자료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창녕비」는 순수비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교의 반포라는 행적이 강조되고 각지의 군주가 한 자리에 모였다는 독특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이는 「창녕비」가 가야 방면과 신라의 상호관계 속에서 특정한 목적 하에 입석되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특히 「창녕비」에 기재된 진흥왕을 수가했던 이들은 신라가 새롭게 차지한 영역의 지방관이 상당했다는 점에서 지방통치와 연관된 사안을 추론해볼 수 있다. 진흥왕 시기를 전후해서 가야 방면을 둘러싼 백제와의 대립이 있었지만 관산성 전투의 승리 이후에 신라는 대가야를 포함한 가야 방면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제기된 것이 재지사회의 새로운 권력관계 재편과 함께 안정적인 통치체제의 정비라는 과제였다. 이를 위해 진흥왕은 신라와 왕에 대한 충성을 매개로 한 토지 분배를 통해 재지사회를 새롭게 재편하고, 왕과 더욱 밀착하게 만드는 구조를 형성하여 재지사회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진흥왕의 조치에 대하여 가야의 재지 지배층들이 반발한 것이 ‘加耶叛’이라는 사건이다. 이에 대하여 진흥왕은 대규모의 군사를 파견하여 일시에 진압함으로써 가야 방면을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창녕비」는 가야 방면 재지사회 권력의 재편이라는 지방통치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비라는 점이 분석된다.

Abstract

In the reign of King Jinheung, Changnyeong memorial stone, which was stood in Gaya district, have been contestable for integrating its objective and characters. It’s not only attribute to the bad condition of the stone in which the first half part was worn out, but related studies up to date have been handled with Gyo(敎) bestow. Thus, existing researches mostly used Changnyeong memorial stone as an assistant material rather than an assertive approach. However, Changnyeong memorial stone has the similar character of Sunsu Memorial Stones while it stressed out both promulgating Gyo and the four directions Gunju(軍主)s’ gathering at one place. This reflects that the stone was erected under the specific purpose of the mutuality between Gaya district and Silla. Specifically, it is concerned with the local ruling system of Silla in that most of the accompanying persons who followed up with King Jinheung during Sunsu actually came from local governors. Around the reign of King Jinheung, there was a conflict over Gaya district with Baekje and yet after winning in the battle of Gwansan castle, Silla actively pushed to the front of Gaya, including the domain of Daegaya. In this process, Silla was called for reorganizing newly power relations with local elites’ society and maintaining stable ruling system. For these goals, King Jinheung reshuffled land distribution by the medium of loyalty to him. Also he made more affinitive structure with local elites in order to reinforce his ruling power. With regard to King Jinheung’s action, the uprising incident, Gaya Rebellion(加耶叛) deserves special mention. King Jinheung dispatched a large scale militaries and suppressed mutineers all at once. Therefore, Changnyeong memorial stone is important in the way that it held the contents about reorganizing local elites’ power in Gaya district and closely associated with local ruling system of Silla.

참고문헌 (50)

  1.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중성리비」 「냉수리비」 「봉평비」", ~
  2. "「적성비」 「文成帝南巡碑」", ~
  3. "『三國史記』 『日本書紀』 『禮記』 『孟子』 『史記』", ~
  4. 姜萬吉, "眞興王碑의 隨駕臣名 硏究", 史叢, 1 (1955)
  5. 姜聲媛, "新羅時代 叛逆의 歷史的 性格", 韓國史硏究, 43 (1983)
  6. 김창호, "삼국시대 금석문 연구" (2009), 서경문화사
  7. 金泰植, "6세기 중엽 加耶의 멸망에 대한 연구", 韓國古代史論叢, 4 (199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8. 金泰植, "加耶聯盟史" (1993), 一潮閣
  9. 盧鏞弼, "昌寧 眞興王巡狩碑 建立의 政治的 背景과 그 目的", 한국사연구, 70 (1990)
  10. 盧鏞弼, "新羅眞興王巡狩碑硏究" (1996), 一潮閣
  11. 노중국, "6세기 전반 대가야의 왕위 교체와 정책의 변화", 한국고대사연구, (66), pp.253~285 (2012), 한국고대사학회
  12. 朴天秀, "加耶諸國의 王權" (1997), 신서원
  13. 백승옥, "문헌자료를 통해 본 가야시기의 창녕지방, in 문헌자료를 통해 본 가야시기의 창녕지방" (2001),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4. 白承忠, "于勒十二曲의 해석문제", 한국사고대논총, 3 (1992),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5. 白承忠, "安羅·加羅의 멸망과정에 대한 검토", 지역과 역사, 4 (1997)
  16. 白承忠, "문헌을 통해 본 고대 창녕의 정치적 동향, in 고대 창녕지역사의 재조명" (2011), 창녕군‧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17. 백승충, "‘加耶叛’ 기사의 재검토", 한국민족문화, (61), pp.323~361 (2016), 한국민족문화연구소[DOI]
  18. 徐榮一, "新羅 陸上 交通路 硏究" (1999), 학연문화사
  19. 신가영, "대가야 멸망 과정에 대한 새로운 이해 -‘加耶叛’ 기사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72), pp.153~190 (2013), 한국고대사학회
  20. 申瀅植, "新羅軍主考", 白山學報, 19 (1975)
  21. 옥재원, "新羅 麻立干期 지역지배의 양상과 금공위세품의 사여", 신라문화, 47, pp.19~54 (2016), 신라문화연구소
  22. 윤성호, "新羅의 大加耶 복속 과정에 대한 재검토", 한국사연구, (155), pp.1~33 (2011), 한국사연구회
  23. 이강래, "崔永禧先生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1987), 探求堂
  24. 李基白, "大等考", 歷史學報, 17‧18 (1962)
  25. 李文基, "新羅의 六部兵과 그 性格", 歷史敎育論集, 27 (2001)
  26. 李銖勳, "新羅 中古期 州의 構造와 性格", 釜大史學, 12 (1988)
  27. 이연심, "‘왜계가야관료’를 매개로 한 안라국과 왜", 한일관계사연구, (31), pp.3~42 (2008), 한일관계사학회
  28. 李永植, "新羅의 對外關係史硏究" (1994), 新羅文化宣揚會
  29. 이영교,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2006),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30. 李鎔賢, "伽倻(大加耶)를 둘러싼 국제적 환경과 그 대외교섭", 韓國古代史硏究, 18 (2000)
  31. 이우태, "한국금석문집성 5" (2014), 한국국학진흥원
  32. 이우태, "한국금석문집성 6" (2014), 한국국학진흥원
  33. 이정숙, "제1부 한국고대사의 복원 : 진흥왕대 우륵 망명의 사회 정치적 의미", 이화사학연구, (30), pp.35~47 (2003), 이화사학연구소
  34. 李漢祥, "5~6世紀 新羅의 邊境支配方式 : 裝身具 分析을 중심으로", 韓國史論, 33 (1995)
  35. 李炯基, "大加耶의 形成과 發展 硏究" (2009), 경인문화사
  36. 李熙眞, "加耶의 消滅過程을 통해 본 加耶-百濟-新羅關係", 歷史學報, 141 (1994)
  37. 李熙眞, "加耶政治史硏究" (1998), 學硏文化社
  38. 장창은, "<昌寧眞興王拓境碑>와 신라의 영역 확장-大加耶 정복을 중심으로-", 신라사학보, (26), pp.5~49 (2012), 신라사학회
  39. 전덕재, "신라 중고기 州의 성격 변화와 軍主", 역사와 현실, 40 (2001)
  40. 정동락, "于勒의 생애와 활동 - 정치적 측면을 중심으로 -", 민족문화논총, (42), pp.265~301 (2009), 민족문화연구소
  41. 朱甫暾, "加耶滅亡問題에 대한 一考察", 慶北史學, 4 (1982)
  42. 朱甫暾, "新羅 中古期의 郡司와 村司", 韓國古代史硏究, 1 (1988), 한국고대사연구회
  43. 朱甫暾,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 (1998), 신서원
  44. 朱甫暾,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2006),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45. 朱甫暾, "문헌상으로 본 고대사회 창녕의 향방, in 한국고대사 속의 창녕" (2009), 창녕군‧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46. 千寬宇, "加耶史 硏究" (1991), 一潮閣
  47. 최진열, "북위황제 순행과 호한사회" (2011),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48. 韓國古代社會硏究所,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 (1992),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49. 홍성화, "4~6세기 百濟와 倭의 관계-『日本書紀』내 倭의 韓半島 파병과 百濟·倭의 인적교류 기사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36), pp.3~38 (2010), 한일관계사학회
  50. 田中俊明, "加耶史論" (1993),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7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