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전후 章士釗의 근대국가구상
Zhang Shizhao's Modern State Conception around the Revolution of 1911
0
조회
0
다운로드
2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이 논문은 신해혁명 전후 章士釗의 근대국가구상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청말 章士釗는 혁명파의 일원으로 혁명운동에 참가하였으나 좌절을 겪은 뒤 ‘求學救國’을 선택하였고, 영국 유학을 통해 근대정치체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유학시기 이미 『帝國日報』를 통해 영국식 정당정치를 국내에 소개하였으며, 이어서 『民立報』와 『獨立週報』를 통해 중국의 당면한 정치현실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정치적 주장을 이어갔다. 『帝國日報』 시기 章士釗는 영국 정치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국회, 정당, 내각, 정당내각 등 개념을 소개하였다. 비록 그의 인식과 소개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일반적 지식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세워지기 이전 章士釗가 근대정치체제를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선구자였음을 보여준다. 『民立報』의 주필로서 章士釗는 당면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영국식 二院制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중국의 현실에 맞는 一院制를 주장하였고, 뚜렷한 정강을 갖추지 못한 정당의 문제를 거론하며 ‘毁黨造黨論’을 주장하였다. 특히 毁黨造黨論은 정당들의 난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 구상이라는 점에서 章士釗의 거시적 국가구상을 보여준다. 『獨立週報』 시기 章士釗는 袁世凱의 집권으로 인한 중국의 모순된 정치상황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중화민국은 비록 內閣制를 채택하였으나, 일부 미국식 총통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내각제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約法體制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헌법의 制定과 起草 방안을 제시하였다. 章士釗의 근대국가구상은 헌법에 기반을 둔 보다 성숙한 중국의 건설이었음을 보여준다.
Abstract
.
참고문헌 (26)
- 章含之, "章士釗全集1, 2, 4, 5" (2000), 文匯出版社
- 中國人民政治協商會議全國委員會文史資料硏究委員會, "辛亥革命回憶錄 2" (1962), 文史資料出版社
- 孫中山, "孫中山全集 2" (1982), 中華書局
- 陳旭麓, "『宋敎仁集』下" (2011), 中華書局
- 湖南省社會科學院, "黃興集" (1981), 中華書局
- 鄒小站, "章士釗社會政治思想硏究(1903-1927)" (2001), 湖南敎育出版社
- 袁景華, "章士釗先生年譜" (2001), 吉林人民出版社
- 白吉庵, "章士釗傳" (2004), 作家出版社
- 張玉法, "民國初年的政黨" (2004), 岳麓書社
- 姜義華, "现代性: 中國重撰" (2008), 北京師範大學出版社
- 錢基博, "現代中國文學史" (1986), 岳麓書社
- 鐙屋一, "章士釗と近代中國政治史硏究" (2002), 芙蓉書房出版
- 潭昌霖(Tan Chester C.), "中國現代政治思想史" (1977), 지식산업사
- 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講座中國史Ⅵ" (1989), 지식산업사
- 郭華淸, "從廢學救國到苦學救國-靑年章士釗在日本和英國的留學經歷及其思想轉變", 安徽史學 (2001)
- 郭雙林, "在立憲與革命之間-試論武昌起義前後章士釗的政治思想", 史學月刊 (2002)
- 張謙, "章士釗和他的政黨政治論", 求是學刊 (2001)
- 陳宇翔, "章士釗的政黨理念與“毁黨造黨”說", 浙江社會科學 (2000)
- 郭華淸, "章士釗与『民立報』", 安徽史學 (1999)
- 龍敏賢, "章士釗與『獨立週報』", 出版科學 (2004)
- 長勇, "再議“革命軍起、革命黨消”", 淸華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2002)
- 姜波, "梁啓超與民國初年政黨政治", 江蘇社會科學 (1992)
- 遲雲飛, "强有力政府與政黨內閣: 民初建立共和政治的困境-以孫中山與宋敎仁的共和政治設計爲中心", 杭州師範大學學報(社會科學版) (2014)
- 姜義華, "民初政黨政治與黃興民初政治思想的發展", 复旦学报(社會科學版) (1994)
- 張學繼, "民國初年的政黨政治爲什麽失敗", 文史雜志 (1992)
- 이상구, "章士釗의 早期 言論活動과 政治思想 - 『蘇報』와 『國民日日報』 時期를 中心으로 -", 대구사학, 119, pp.357~392 (2015), 대구사학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