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양병설의 실체
An Assessment of the Alleged Proposal to raise One Hundred Thousand Tro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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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 글은 우리가 임진왜란 대비 선견지명으로 알고 있는 ‘십만양병설’의 실체를실록이나 이이의 문집 등에 나타난 기록 및 새로운 사료들을 통해 정밀하게 검증하여 사실여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주요 발견은 이이가 ‘니탕개의 난’에 대비하여 병조판서를 맡긴 선조의 양병지시를 받고도 민력이 쇠잔해 있음을 감안하여 ‘백성을 기르는 양민이 먼저’라고보고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이는 양민(養民)의 방도로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현물세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지론을 다시 펼쳤지만, 선조가 공안의 개정에불응함으로써 성과 없이 논의가 끝난 것으로 사료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이 글은이이의 정치 지향이 왕도정치 사상으로서 무리하게 십만 양병과 같은 정책을 펴는 것과 상반되었다는 것을 밝히며, 당시의 인구·재정 등 사회경제적인 여건도십만 양병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도 짚어 보았다. 하지만 김장생은 이이의 전기를 지으면서 원래의 사료와 다르게 현저하게 왜곡된 ‘십만양병설’을 만들어서 일화로 수록하였었다. 이후 서인들이 계속 정권을잡게 되면서 자파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왜곡된 김장생의 기록이 선조수정실록에도 실리도록 하여 국가의 공식 기록에 올랐다. 그리고 율곡 연보 등다른 기록에서는 김장생이 지은 원전(原典)까지도 그럴듯하게 추가 변개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극일’ 및 ‘부국강병’ 분위기로 인해 왜곡이 오히려 더해졌다. 이로써 임란 당시 생존하지 않았던 이이가 국방에 더 큰 공이 있는 것처럼 존숭되고, 임란을 극복한 류성룡은 오히려 십만 양병에 반대하여 나라를 위기에 빠트린 인물로 호도되는 명예 훼손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점도 사료를 통해 허위임을 밝혔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quire into the so-called “Yul-gok’s proposal to draft 100,000 men into armed forces,” widely recognized as Yi Yi’s (李珥, 1536-1586) foresight against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based on a close examination of Yi Yi’s literary works. Yi Yi reported “commoners should be raised first” in consideration of the poor public power even after receiving orders from King Sŏnjo, who entrusted the court to prepare for the “Ni T’anggae Rebellion.” In addition, Yi Yi re-examined the principle that the burden of taxes in kind should be reduced by revising the tribute case as a way for the people of commoners, but it was confirmed through the records that the discussion ended without results as King Sŏnjo refused to comply with the revision of the tribute case. The paper reveals that Yi Yi’s political orientation was contrary to his unreasonable the policy of carrying out the same policy as “nurturing 100,000 soldiers against possible foreign enemies” as the king's political ideology, and also pointed out that the socio-economic conditions of the time, such as population and finance, could not handle the proposal to draft 100,000 men into armed forces. However, Kim Jangsaengs’ anecdotal note would form the mythological basis of on Yi Yi’s alleged proposal of “nurturing 100,000 soldiers against possible foreign enemies.” Since then, the biographies of Yi Yi continued to cite Kim Jangsaeng’s notes. Finally, it was included in the Sŏnjo sujŏng sillok for the purpose of strengthen the legitimacy of the reign. In addition, the other records, including the Yulgok Chronicle, show that even Kim Jangseang’s writings were doctored.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s colonial rule, the nationwide slogans of “overcoming Japanese” and “enriching the state” and strengthening the army intensified the myth. This resulted in the elevation of Yi Yi, who did not surviv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s if he made greater contributions to the national defense, and Ryu Sŏngnyong, who made real contributions, was misinterpreted as having ill-advisedly opposed the proposal of raising 100,000 troops. It will be shown that this point is also historically inaccur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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