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시기 경주지역의 목관묘·목곽묘 전개와 사로국
Saroguk and the Development of the Wooden Coffin and Wooden Chamber Burials of the Gyeongju Region in the Proto-Three Kingdoms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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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에서 원삼국시기의 고식와질토기가 출현하는 서기전 1세기 초부터 경주지역에서는 초기철기시대 이래의 선주민과 낙랑군의 설치로 새로 남하한 위만조선계 유이민들에 의해 서로 다른 계통의 목관묘 및 목곽묘가 축조되고 있었다. 이들은 경주지역에서 사로국의 성립과 사로국 성립 당시의 주민의 계통을 말해준다. 그러나 곧이어 부장토기가 교류되고 묘제가 상호 교차하여 축조되는 등 계통이 달랐던 주민이 융합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로국 전기에는 고분군에 따라 청동거울 부장묘나 다수의 철모 부장묘 등 유력개인묘가 돌출적으로 존재하였으나, 고정적으로 사로국의 수장들이 피장된 중심고분군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사로국 전기의 유력개인묘는 모두 선주민 계통의 목관묘가 확대된 것들이었다. 영남지방에서 신식와질토기가 출현하는 서기 2세기 중엽경부터 경주지역에서는 유적에 따라 서로 다른 계통의 목곽묘가 조영되면서 사로국은 후기로 전환하였다. 대표적으로 황성동유적에서는 사로국 전기에 발생한 재지계 목곽묘가 축조되었고, 중산리유적에서는 목곽의 평면구조와 결구방법이 그와는 다른 목곽묘가 축조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사로국에 다시 새로운 주민이 유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계통의 목곽묘는 시차를 두고 같은 방향으로 변천되어 주민의 동질화 과정을 보여준다. 사로국 후기의 목곽묘는 사회의 계층화가 한층 더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경주분지 중앙에 월성북고분군이 조영되기 시작하면서 사로국의 중심고분군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사로국 후기 경주지역의 고분군들은 최고 위계의 월성북고분군을 정점으로 일원적인 위계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로국 후기까지는 경주지역 목곽묘들의 이질성이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사회 내부의 완전한 통합도 이루지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로 내부의 완전한 통합은 경주지역의 목곽묘와 고분군이 이혈주부곽식 목곽묘 중심의 월성북고분군을 정점으로 동혈주부곽식과 세장방형 목곽묘가 조영된 각 지구 고분군으로 위계화되어 일원적인 체계를 갖추는 신라 조기에 들어와서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신라는 그와 같은 사로 내부통합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으로 진출하여 지방지배를 실현해 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조기는 사로국 후기와는 다른 질적인 변화를 이룩한 사회였음이 다시 확인된다.
Abstract
In the Yeongnam region during the Proto-Three Kingdoms Period, the Gyeongju area witnessed the establishment of two different burial traditions at around the first century BCE (when archaic style wajil pottery first came to be used), wooden coffin burials and wooden chamber burials. Each of the burial traditions is believed to be associated with the indigenous populations that resided in the area since the Early Iron Age, and the migrant population of Weiman Joseon that had fled southwards following the establishment of the Lelang Commandary, respeictvely. The wooden coffin and wooden chamber burials therefore provide information about the establishment of Saroguk and the nature of the communities that were present in Gyeongju at the time. The fact that the exchange of grave goods (in the form of pottery) and even burial structures occurred soon afterwards indicates that the two communities soon began to intermix. A central burial ground where ‘chiefly’ individuals were regularly buried was not yet established in Saroguk’s early phase, although there are sporadic burials of ‘important’ individuals, furnished with a bronze mirror or many bronze spearheads can be observed at the burial grounds of this period. All of the ‘important’ burials of this early phase in Saroguk’s development were based in the tradition of the wooden coffin burials of the indigenous population. Wooden chamber burials of two different traditions came to be used around the mid-second century CE (when new style wajil pottery made an appearance) in the Gyeongju region, marking the transition to the late phase of Saroguk’s development. The site of Hwangseong-dong witnessed the construction of a type of wooden chamber burial which emerged in the Gyeongju region during Saroguk’s early phase. The site of Jungsan-ri, on the other hand, witnessed the construction of a different type of wooden chamber burial that had a different layout and method of assembling the wooden structure, representing the influx of a new population into Saroguk. However, the fact that both types of wooden chamber burials developed in a similar manner, albeit with a time gap, can be seen to indicate that the two populations had intermixed and were becoming homogenous. The wooden chamber tombs of Saroguk’s later phase illustrate increased social stratification. The Wolseong North Burial Ground, which was formed in the center of the Gyeongju Basin, appears to have functioned as Saroguk’s central burial ground. The tombs of the Gyeongju region in the late Saroguk phase were stratified according to a single system in which the Wolseong North Burial Ground stood at the apex of the pyramid. However, the presence of heterogeneous elements amongst the wooden chamber tombs shows that complete social cohesion had yet to be achieved. It can be argued that the internal cohesion of Saroguk society became completed in the Incipient Silla Period, as witnessed by the establishment of a single system of tomb construction in which Wolsung North Burial Ground, representing the highest status group, which featured wooden chamber tombs that had the main burial chamber and grave goods compartment built in separate pits; the other burial grounds of lower ranked groups featured wooden chamber tombs with the main burial chamber and grave goods compartment located in a single pit. Based on this internal social cohesion of Saroguk, Silla was able to expand into neighboring regions and establish its system of local rule. In this way, the society of Incipient Silla wa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that of Saroguk’s later ph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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