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 김원벽의 생애와 민족운동
The Life and the National Movement of Hyoseong Kim Won-Bye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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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김원벽은 1894년 황해도 은율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독교의 자장 속에서 성장한 그는 경신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중앙YMCA와 승동교회의 활동을 통해 기독교 학생들의 리더로 부상하였다. 또한 동문회와 지역 학생친목회의 조직을 주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백아덕(Becker), 박희도, 이병조 등과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김원벽은 종교계와 함께 3․1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학생지도부의 조직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관원 모임 이후 강기덕․한위건과 함께 학생지도부의 리더로 제반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종교계와 학생계의 ‘일원화’ 합의에 관여하고,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전개된 제2차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1921년 11월 출옥한 김원벽은 사회운동에 매진하였다. 먼저 식민지 조선이 처한 현실과 문제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대중강연을 통해 설파하였다. 1922년 1월에는 박희도, 이병조 등 황해도 인맥과 함께 신생활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 극복이라는 지향성을 함께 했던 ‘신생활사그룹’의 사회주의자들과 『신생활』을 발행하였다. 식민지 조선을 개조하기 위한 ‘신생활’의 ‘신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신생활사 필화사건 이후 언론계에서 활동하던 김원벽은 건강상의 문제로 사리원으로 낙향하였다. 낙향한 이후 그는 지역의 대중운동에 참여하였다. 특히 선운동우회(鮮運同友會)의 활동에 적극적이었는데, 일제의 ‘1역(驛)1점(店)주의’에 반대하여 ‘1역2점주의’를 주장하였다.
Abstract
In 1894, Kim Won-Byeok(1894∼1928) was born as the son of a pastor in Eunyul, Hwanghaedo. He grew up in Christian circles and got into Yonhee College after being graduated from Kyungshin School. He emerged as the leader of Christian students due to the movements of the YMCA and Seungdong Church. Also, he led the alumni association and the regional students’ society, and interacted with Becker, Park Hui-Do, and Lee Byeong-Jo. Kim Won-Byeok played a key role in organizing the student leadership, which was an important group of the March 1st Movement with the religious circle. After the Daegwanwon meeting, he led the student movement with Kang Gi-Deok and Han Wi-Geon. He engaged in the agreement of the unification of religious and students groups, and led the 2nd Protest at the Namdaemun Station Square. Kim Won-Byeok worked hard on social movements after leaving prison on November, 1921. He gave lectures on the reality and problems of the Japan-occupied Korea. He organized the Sinsaenghwalsa with Park Hui-Do, Lee Byeong-Jo, and others of the Hawnghaedo network, and published New Life (『新生活』) with socialists of the ‘New Life Group’, who shared the ideas of overcoming the reality of colonial Joseon. This was the ‘new movement’ of ‘new life’ to renovate colonial Joseon. After the persecution of Sinsaenghwalsa, Kim Won-Byeok worked as a journalist but went to his hometwon, Sariwon, because of his illness. And he participated in the regional mass movement. There he was active in the Seonundonguhoe and argued against the One Station-One Office Policy of Japanese Imperialism, supporting the One Station-Two Office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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