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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毌丘儉紀功碑와 관련하여

魏毌丘儉紀功碑と関し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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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기공비는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동천왕 20년 秋8月條(246년-신라 조분왕 17년․백제 고이왕 13․魏 齊王 7년)에 기록된 魏將 관구검의 침공과 관련된 유물이다. 질 좋은 철의 산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은 고구려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태조왕 이래로 꾸준히 추진되던 고구려의 요동경략은 후한 이후의 혼란을 틈타 요동을 근거지로 삼은 공손씨에 의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공손씨의 존재가 自國의 이익에 큰 위협이 된다고 인식한 고구려는 동천왕 8년(234) 위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온 것을 계기로 위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고구려는 요동공략에 장애가 되는 공손씨를 견제하고 결국은 제거하기 위하여 위와 오, 양국과 동시에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위가 더 필요했으므로 魏와의 외교에 중점을 두게 된 것이다. 공손씨가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게 되자 당시 중국대륙의 ‘삼국시대’라는 복잡한 상황과 맞물려 점차 요동은 중국영향권에서 이탈해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공손씨가 위와 오 사이에서 그 대립을 이용하여 외교전을 펼치게 되자 오, 촉과 대결상태였던 위는 후방인 요동 공손씨 정권에 대해 유화책을 취하였고 공손씨도 위나라쪽으로 기울게 되었으나 위의 정책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공손씨를 그대로 두고서는 요동이 안정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당장 국익에 손해가 된다는 점에 있어서 고구려는 삼국 중 魏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던 것이다. 이후 魏가 공손연을 공격하여 요동에 三代 50여 년 동안 자리잡고 배후에서 위를 위협해온 공손씨 문제를 마무리지을 때 고구려는 군사를 보내 돕기까지 하였다. 동천왕이 위와 우호관계를 맺고 원군까지 보냈던 것은 복잡한 상황을 극복하고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기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게도 요동은 배후안정과 삼국전쟁에서 우위를 점하여 전쟁에 전념하기위해 양보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결국 고구려와 위의 연대역시 일시적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는 요동의 지리와 사정에 익숙한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어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관구검의 고구려 공격은 단순히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배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중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장악하려는 魏의 대외정책 중 하나였다. 그것이 요동을 공략하면서 적극적 대외정책을 펼쳐나가던 고구려와 충돌하게 된 것이다. 위의 침공이 고구려에게 준 충격은 컸으나 곧 중원에서 魏․晋의 왕조교체가 일어나고 위의 뒤를 이은 진도 오래가지 못한 채 환란에 휘말리면서 중국세력은 요동과 한반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러한 대외적 여건도 고구려가 빠른 시간 내에 국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후에도 고구려는 끊임없이 요동을 공략하였고 미천왕이후. 고국원왕시기의 시련을 딛고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관구검의 침공은 배후를 튼튼히 하여 삼국 간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고 중국중심의 세계질서를 되찾고자 하는 위의 대외정책과 전략적 요충지였던 요동을 차지하여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 고구려의 대외정책, 양국 간 대외정책의 충돌이었던 것이다.

Abstract

毌丘倹の紀功碑 (コァングゴンギゴンビ)は 『三国史記』 [高句麗本記] 東川王[とうせんおう] 20年 秋8月條(246年- 新羅の助賁王 17年_百済の古爾王13_魏 齊王 7年)に記録された魏将の毌丘倹の 侵攻と関わる異物である。質のよい鉄の産地でありながら戦略的にも 要衝地である遼東半島は高句麗にとって重要なちいきであった。太祖大王 (たいそだいおう、47年 - 165年、高句麗の第6代の王)以来、徐々に推進されてきた高句麗の 遼東半島 経略は後漢以降の混乱の間に遼東を根拠地にした。公孫氏により難関にぶつかるようになる。公孫氏の存在が時刻の利益に大きな脅威になると判断した高句麗は 東川王8年(234)、 魏から使臣を 送ったことをきっかけに魏と友好関係を結ぶ。高句麗は遼東攻略に障害となる公孫氏を牽制し、結局は 除去するため魏、呉両国とも友好関係を維持していたが、現実的に魏との関係をより必要としていたため 魏との外交に重点を置く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公孫氏が影響力を広めていくようになり、遼東は次第に当時の中国大陸の三国時代という複雑な状況と ともに中国の影響圏から遠ざかっていく様子を見え始めた。公孫氏は魏と呉との間で両国の対立を利用し 外交策を展開して呉・ 蜀を警戒していた魏は後方である遼東の公孫氏政権に対して宥和政策を取り、公孫氏も魏の見方のような立場を見せたが、魏の政策は一時的なものであった。公孫氏をほっといたら遼東は安定しないし、そうなれば国益に損になるということで、高句麗は三国のなかで 魏と理解関係が一致した。以降、3代にかけて50年間 遼東で魏を脅かしてきた公孫氏の問題にけりをつけるため、魏が公孫淵を攻撃するときに、高句麗は派兵までして手伝う姿をみせたのがその証拠である。東川王が魏と友好関係を結んで、支援軍まで送ったのは複雑な当時の状況を克服して高句麗が遼東を 攻略するための基盤を整うためであった。しかし、魏にとっても遼東は背後の安定や三国戦争で優位を占めて 戦争に専念するという理由でも譲歩せぬ地域であった。結局高句麗と魏の連帯も一時的なものであるだけだった。そして魏は遼東の地理や事情に詳しい幽州刺史の毌丘倹を行かせて高句麗を大々的に侵攻した。毌丘倹 の高句麗攻撃は単純に遼東から高句麗を排除するためだけではなく、中国を統一して天下を掌握しようと する魏の対外政策の一つであった。それが遼東を攻略することで積極的な対外政策を展開していた高句麗と 衝突したのであった。魏の侵攻が高句麗に与えた衝撃は大きかったが、やがて中原では魏晋の王朝が交替され、魏を引き継いだ晋も 長くは続かず乱に巻き込まれ、中国のあらゆる勢力は遼東や韓半島にまで手が回らなかった。こんな対外的な状況が 高句麗が短時間で国力を回復できる環境となった。以降も高句麗は遼東を攻め続けて、 美川王(高句麗の第15代の王) 以降、 故国原王(高句麗の第16代の王)時代の試練を押し切って遼東を占めるようになる。結局 毌丘倹 の侵攻は、背後を丈夫にし三国間の抗争で主導権を握り、中国中心の世界秩序を取り戻そうとした魏の対外政策と、戦略的な要地であった遼東をしめて国家の発展を図ろうとした高句麗の対外政策と両国の対外政策の衝突であったのである。

참고문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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