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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예학의 지역적 분화과정과 그 특징

The Regional Specialization Process of Yehak and its Feature in 16~1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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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중기 예학의 지역적 분화과정과 그 특징을 지역정체성의 형성과 향례鄕禮에 대한 인식, 예학의 지역적 전개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군현郡縣과 도道를 하나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성리학적 소양을 강하게 지닌 사림이 재지사족으로 지역사회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부터였다. 그리고 하나의 역사‧문화적 단위로서의 도가 형성되는 데는 성리학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사림들이 예학에서 독자적인 지역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도 지역정체성의 형성과정과 궤를 같이 하였다. 조선사회에서 향당鄕黨의 예禮로서의 향례의 개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시행하려고 한 것도 16세기 들어와서였다. 또한 주자의 『의례경전통해』를 모범으로 하여 가례家禮‧향례鄕禮‧방국례邦國禮‧왕조례王朝禮를 균형있게 복원한 정구의 『오선생예설분류』, 향례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고 향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유형원의 『반계수록』, 향례라는 항목이 처음 등장하는 박세채의 『육례의집』에서 알 수 있듯이 17세기로 넘어가면 조선의 학자들은 향례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가고 예학에서 향례는 독자적인 분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나아가 17세기 향촌 정책의 두 흐름은 향례에 대한 인식의 차이, 즉 교화의 측면과 통제의 측면 어느 쪽을 중시하느냐와 연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사림들은 향례를 가례 또는 왕례와 대립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주자의 『의례경전통해』의 가례‧향례‧방국례‧왕조례와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예를 행하는 주체와 그 실천의 장을 유기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정체성의 형성과 예학에서의 지역 인식은 예학의 지역적 분화과정과 궤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는 아직 학파 또는 지역에 따라 예론이나 예설의 차이가 거의 없었으며 아직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많았던 시기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학파와 지역에 따라 예학의 차이가 나타나지만 이 시기 예학의 발달은 예학자들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활발한 학문교류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17세기 전반까지 이들은 붕당에 관계없이 의문나는 예설과 그 근거에 대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으며 그것을 자신의 예학과 예서에 반영하였다. 한편 학파와 지역에 따른 예학의 차이는 17세기 전례논쟁典禮論爭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예학의 심화에 힘입어 발달하였던 이 시기의 전례논쟁은 역으로 예학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 충청지역 이이 계통의 서인‧노론과 서울‧충청지역의 성혼‧김상헌 계통의 소론학자들은 『의례』와 『주자가례』를 모범으로 삼으면서 가례‧향례‧방국례‧왕조례를 복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주로 사례士禮의 입장에서 왕례王禮를 흡수하여 왕사동례王士同禮를 주장하였으며, 소론은 사례와 왕례를 균형있게 보면서 왕사부동례王士不同禮를 주장하는 경향이 더 강하였다. 이에 반하여 서울‧경기지역의 서경덕‧조식 계통의 기호남인들과 최석정 등 일부 소론들은 『주례』‧『예기』 등 고례古禮를 기반으로 하여 왕사부동례를 강조하였다. 결국 학파와 지역에 따라 예학의 차이가 드러나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17세기 중반에 가서야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학파‧같은 지역 안에서도 예학의 차이가 없지 않으므로 학파와 지역에 따른 예학의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보다 세밀한 접근과 분석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Abstract

This article is to consider the regional specialization process of Yehak(the study of ritual thoughts) in middle Joseon. and its feature focusing on the formation of the local identity, the recognition of Hyangrye(鄕禮), the regional development of Yehak Beginning to recognize counties and province as independent existence having one history and culture was from that Sarim possessing strong Neo-Confucianism in 16th century settled confirmly down in regional society as Jaejisajok(在地士族). And Neo-Confucianism was closely related to the generation of province as the unit of one history and culture. And this formation of local identity and regional recognition in Yehak had the same way with regional specialization process of Yehak. But there were no differences of ritual theory according to the school and the region in 16th century, and it was still the period of common point rather than different point. Coming up 17th century, there was differences according to the school and the region, but the development of Yehak in this period contributed to a lot for the opposition of ritual scholars as well as active scholarship interchange. Until early 17th century, they interchange their opinions about the ritual theory and its base without parties and reflected them in their Yehak and ritual books. In the meantime, the difference according to the school and the region was directly reflected on the ritual controversies in 17th century. The ritual controversies in this time that strongly developed with deepening of Yehak affected oppositively to research of Yehak. Seoin and Noron with the school of Yi I in Chungcheong area and Soron scholars with a school of Seong Hon and Kim Sang-heon in Seoul and Chungcheong area tried to recover Garye(家禮) and Hyangrye, Banggukrye(邦國禮), Wangjorye(王朝禮) with a model of 『I li(儀禮)』and 『Chu Tzu chia li(朱子家禮)』. But Noron usually insisted Wangsadongrye (王士同禮) absorbing Wangrye(王禮) in aspect of Sarye(士禮) and Soron did more strongly insist Wangsabudongrye(王士不同禮) in view of Sarye and Wangrye in balance. On the contrary to this, Kihonamin with the school of Seo Gyeong-deok and Jo Sik and Soron like Choi Seok-jeong emphasized Wangsabudongrye based on Old rituals(古禮) like 『Chou li(周禮)』 and 『Li chi(禮記)』. Finally the difference according to the school and the region was appeared, and based on this, it was the middle of 17th century that the dispute of academic and politic was be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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