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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治年間(1488-1505)의 經筵과 政局運營 - 내각제 복원과 공론정치와 관련하여-

弘治年間(1488-1505)的經筵和政局運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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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연간의 경연제도는 홍치원년(1488) 2월 ‘경연의주’가 제정됨으로써 마침내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그해(1489) 3월 황제는 早朝가 끝난 뒤 문화전에서 경연(월강)을 처음으로 열고, 그 다음 날에는 일강을 개최함으로써 이 시기 경연이 정제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연이 시작된 지 불과 2개월이 지난 5월에는 경연 시행을 둘러싸고 조정 대신들과 과도관을 비롯한 사대부 사이에 논쟁이 가열되기에 이르렀다. 이들 정치세력 간에 전개된 의견 대립 양상은 이후 경연 시행의 목적과 취지뿐만 아니라, 정국운영 방식과도 직결되었다. 즉 과도관을 비롯한 사대부 세력들은 명 중기 이래 등장하기 시작한 공론정치의 연장선상에서 경연의 실질적 기능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경연을 통해 언로를 확대 개방하여 공론을 반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조정 대신들은 제도와 의례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내각제를 복원하고 경연을 시행케 하는 한편, 여기서 閣臣과 廷議의 대신들을 중심으로 정사협의를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치제는 조정 대신들의 주장을 수용하여 내각의 인적 구성을 재편하는 동시에, 내각제를 복원하고 경연을 시행하였다. 이는 특히 홍무․영락연간의 중앙정치조직과 정국운영체제, 즉 ‘祖宗之制’로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황제 개인의 ‘備顧問’기구에 불과한 내각제의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황제가 주도하는 정국운영을 꾀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정국운영 방침에서 시행된 홍치연간의 경연에서 그 정사협의 대상은 자연히 각신을 비롯한 중앙언로에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 고조되고 있는 과도관을 비롯한 사대부들의 공론이 반영되는 정치적 공론장으로서 경연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의 경연은 공론정치의 이상인 君臣共治를 반영하는 공론장으로서 발전되기는커녕, 공론의 비판을 완화하고 유교적 통치이념의 실현을 위한 하나의 상징이자 수단으로서 단지 의례적인 형식으로만 시행될 뿐이었다. 그나마도 홍치8년(1495) 이후로는 황제가 視朝를 지각하는 등 政事를 등한시하는 가운데, 극소수 각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輔政體制에 의해 정국운영이 좌우되는 상황에서 정사협의의 장인 일강이 마침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 이후로는 단지 월강만이 의례적인 형식으로 간헐적으로 지속되다가 그나마도 중단됨으로써 경연제도는 마침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홍치연간은 봉건사회가 동요되는 가운데 제반 사회의 변화상을 대변하는 사대부들의 공론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君臣 간의 정치적 공론장인 경연에서는 이러한 당시의 공론정치를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祖宗之制’의 황제독재체제로 복귀함으로써 언로의 장을 제약하였다. 이에 따라 홍치연간의 경연에서는 君臣共治의 ‘公天下’의 실현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 채, 황제의 私的 권력인 ‘家天下’로 회귀함으로 인해 시대의 변화상을 수용하거나 이를 발전적으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였다. 따라서 홍치연간의 경연제도를 통해 볼 때, 이른바 ‘홍치중흥’은 평가는 그 타당성에 있어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Abstract

弘治年間的經筵制度, 因由吏部右侍郞楊守陳進呈的上疏, 就在弘治元年年2月開始奠定了經筵制度. 因此, 在該年3月於文華殿, 弘治帝就開設了第一次的經筵, 且過一天他又開了日講. 開設經筵之後不到兩個月, 就在該年5月, 圍繞施行經筵的事, 朝廷內的政治勢力之間引起了一場糾紛. 卽特別在於朝廷大臣和科道官之間發生的這場糾紛, 就對於向後所施行的經筵之目的提供了直接的影響, 並且有密接地連繫與當時政局運作. 卽科道官爲中心的士大夫勢力, 就强調經筵上的現實性之功能, 所以他們特別注重了言路開放和政事協議. 相反地, 朝廷大臣們主張恢復內閣的功能, 同時他們特別强調了皇帝與大臣之間需要政事協議, 以皇帝主導地運作政局. 對於這場糾紛, 弘治帝就收容了大臣們的意見. 因此, 他就登上皇帝後, 卽時施行了復原內閣制度的措施, 且補充了新的內閣成員, 而以致施行了經筵. 這就意味着不但恢復洪武․永樂年間的政治運作形式, 幷且它就反映了恢復內閣的當初功能, 以致實現了皇帝主導政局的模式. 所以弘治初期所施行的經筵制度來看, 其政事協議的對象, 自然而然的只局限於閣臣和廷臣, 就是不可避免的. 因此, 當時所的施行的經筵制度就難免只注重於儀禮上的形式或名分. 如此施行經筵的情況之下, 特別在弘治3~7年期間, 科道官們不斷地呈上了上疏而强調要施行經筵, 以實現擴大言路和協議政事. 如此具有科道官們這樣頻繁地上疏的現象, 就反映了當時經筵制度絶不能圓滿的發揮着其功能. 在這種情況之下, 尤其在弘治8年(1495)之後, 弘治帝連朝廷會議都不參. 且自從弘治12年(1504)開始, 大部分的政事又只委託了給於極少數的閣臣. 因此, 經筵制度也漸變爲有名無失的存在. 總之, 弘治年間的經筵, 與其反映了當時蓬勃的公論政治, 不如恢復皇帝掌握政局的形式, 因而以內閣中心的中央言路做爲政事協議的對象. 所以弘治年間的經筵制度, 無法發揮了實現當時士大夫主張的公論政治, 因而經筵制度只變爲儒敎儀禮形式而施行着, 所以經筵的目的也無法爲達成的. 因此, 弘治年間的經筵制度不能發展於容納了當時社會上的諸變化, 而只回歸走向復元‘祖宗之制’而退步了. 由此可見, 所謂‘弘治中興’也有必要再考慮的餘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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