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代 前期 西學 受容의 형식과 외연
清代前期西学受容の形式と外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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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西學 수용의 형식은 서양의 천문역산학에 기초한 時憲曆이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공식 曆法으로 頒布된 엄연한 현실 속에서 조건 지워졌다. 時憲曆의 반포는 서학을 관학으로 제도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서광계에 의해 정식화된 중서회통과 “서법의 算數를 녹여 중법의 型模에 넣는다”는 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또한 康熙帝 초기 楊光先 曆獄을 거치면서 선교사측 뿐만 아니라 청 제국의 통치의 측면에서도 서교와 서학의 분리는 상호간에 필수적이었다. 한편 사상적으로는 매문정에 의해 우선 명말의 西學=필로소피아의 외연을 西學=마테마티카로 축소하고, 다시 서학과 서교를 분리시킴으로써 西學=필로소피아와 서교를 배제함과 동시에 西學=마테마티카의 수용을 유림의 실학으로서 정당화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점은 주자학자의 西學=마테마티카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數밖에 理가 없고, 理밖에 數가 없다”는 새로운 理數觀을 정립시킴과 동시에 西學=마테마티카의 수용이 가능한 형식으로 주자학적, 경학적 틀을 변화시켰다. 서학과 서교의 성공적인 분리는 청대 전기의 西學=마테마티카의 수용을 매우 안정화시켰다. 전례논쟁의 영향하에 결국 옹정제 이후 청이 엄격한 禁敎 정책을 취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西學=마테마티카의 수용이 주로 황궁의 선교사들과 흠천감을 통해서 줄곧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대의 欽天監은 명말의 서국부터 起算하여 아담 샬이 欽天監 監正의 직책을 맡은 이래, 1773년 예수회가 해산되고 나서도 1837년 마지막 서양인 監正인 포르투갈인 선교사 세라(Lusitanus Serra, 漢名 高受謙)가 병으로 유럽으로 귀국하기까지 200여 년간 줄곧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었고(楊光先 曆獄기간은 제외), 『律曆淵源』과 『曆象考成後編』 등 청대 최고의 西學書가 이 시기에 간행되었다는 두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서학 수용의 제도적 장치로서 볼 때 청대 전기의 수용 형식은 절대로 실패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명말과 대비할 때 지식의 전달자와 수용자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몇 가지 의미에서 제한적이었다. 첫째로는, 中西會通의 논리가 時憲曆의 頒行과 더불어 관학으로 수렴되면서 선교사와 중국인 지식인과의 사적 소통의 통로가 거의 차단되고 명말과는 달리 사상계에 대한 지적 자극이 부족했다. (물론 이 점은 청대의 선교사의 지적 유형이 더 이상 르네상스적이지 않다는 점과도 관련된다.)둘째로는 西學 수용에 있어 지식의 전달자와 수용자와의 관계가 신하와 황제라는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정립되면서 역학관계상 어쩔 수 없이 수용자인 황제의 견해에 좌우되는 약점을 피할 수 없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본인의 강한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康熙帝가 과학자가 아니었던 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서양 과학에 대해 현실적 유용성을 인정하고 필요에 따라 스스로 학습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유능한 황제였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학 활동 자체에 대해 간섭한 점—대표적인 예가 두 가지로 첫째는 선교사 파르낭(Dominique Parrenin, 1665-1741, 漢名 巴多明)이 만주어로 번역한 『格體全綠』의 公刊을 저지하고, 또 하나는 푸케(Jean-François Foucquet, 1665-1741, 漢名 傅聖澤)가 소개한 기호대수학서 『阿爾熱巴拉新法』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려 폐기처분시킴으로써 중국의 역산학자나 의학자에게 새로운 과학이 소개될 기회조차 박탈한 것—은 康熙帝가 西學을 너무나도 정치적으로만 이용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세째로는, 梅文鼎의 경우처럼 주자학의 틀을 통해 西學을 裁斷하는 방식은 西學의 외연을 역산학의 학적 범위에 제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은 漢譯된 서학사의 목록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확인될 수 있는데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명말의 서학 수용과 청대의 서학 수용의 최대의 변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학을 경학적으로 해석하는 수용 방식은 자연스럽게 서학중원설과 결합하는 難點을 갖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청말에 이르러 새로운 근대 과학의 수용의 패러다임으로 기능할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노정하게 된다.
Abstract
本稿は、清代前期、具体的には1644年明清交替から乾隆年間にかけて行われた西学受容について、主に康煕年間を中心に論ずる。特にその受容の形式に焦点を合わせ、イエズス会士という知識の伝達者と、康煕帝や梅文鼎などの受容主体が持つそれぞれの論理を分析することによって、受容された西学が中国の経学的フレームワークの中でいかに位置づけられることになったのか、或いはかかる西学が経学のフレームワークをいかに変化させたのかを問い、その歴史的性格を解明することを目的とする。清代西学受容の形式はまず、西洋の天文暦算学に基づいた時憲暦が清の公式暦として頒布されたという厳然たる現実から生まれた。時憲暦の頒行は、徐光啓によって定式化された「中西会通」の論理を以て正当化され得たが、結果的には、西学といった外来学問を官学として公式に認めたために、楊光先暦獄のような華夷論的抵抗に遭遇した。したがって、西学と西教とを分けることは、イエズス会士にも清帝国の統治者にも必要不可欠であった。一方、梅文鼎は、西学=フィロソフィアの外延をマテマティカの範囲に縮小し、さらに西学と西教とを分けることによって、西教を排除しつつも、西学=マテマティカのみを選択的に受容し、それを儒林の実学として正当化した。梅文鼎の優れた点は、西学を朱子学の中に組み込まれ得るような形に変貌させ、また同時に朱子学理論の枠組みを西学=マテマティカと矛盾しないようにした点にある。これによって初めて、西学=マテマティカの受容が儒者の分内のことになったといえよう。結局、西学と西教との分離は、制度的にも思想的にも、清代の西学受容を非常に安定化させた。典礼論争の煽りで雍正帝以降は厳しい禁教政策に変わるが、にもかかわらず、同時期に『律暦淵源』『暦象考成後編』など清代を代表する西学書が続々と編纂された事実が物語るように、西学=マテマティカの受容は途絶えることなく続けられた。西学受容の形式として、失敗であったとは言えない所以がそこにある。しかし、西学が官学に収斂されてから負の側面も現れた。まず、西学受容において、力関係上皇帝の判断に恣意的に左右される欠陥を避けることができず、さらに、知識人との疎通の通路を失い、中国の思想界に知的刺激を与えることが少なくなり、結局安易に経学的尚古主義に流れたことがそれ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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