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村鑑三と文?者
A men of letters and Uchimura Kan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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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기독교신자이면서 문학자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한 우치무라칸죠는 일본문학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많은 문학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그들의 대부분은 우치무라를 떠나갔다. 우치무라와 문학자와의 관계를 논할 때 그의 곁을 떠나간 문학자에 있어서의 문제를 청년기의 영과 육에 대한 문제로 번뇌하는 문학자들이 아닌 지나치게 엄격한 기독교의 윤리를 요구한 독선적인 우치무라에게 있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연구동향이었다. 그러나 많은 문학자들에게 있어서 우치무라는 정말로 부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까? 반대로 문학의 길로 들어서기 이전 미숙한 청년기였던 그들에게 문제는 없었던 것일까? 또 문학자로서의 모습을 갖고 누구보다 일본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했던 그가 왜 그 정도로 일본문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는가는 위의 몇 가지의 의문점을 포함하여 선행연구를 통해 충분히 해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 논문의 연구를 위해 우선 그 스스로가 문학관을 피력한 [왜 대문학은 나오지 않는가],[어떻게 대문학을 얻을 것인가]를 분석하여 보니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세계의 강대국이 되고 있었던 당시의 시세와 비교해 볼 때 일본문학은 그다지 세계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문학관은 세계에 통하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고 있었으며 문학을 고상한 이상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문학 안에 포함되는 사상을 중요시했으며 창작의 기공으로서의 미문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기독교교리에 철저한 우치무라에게 있어서 화류계를 즐기며 어둡고 추한 것에 소재를 찾는 문학자와 명치시대 자연주의의 문학의 부정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자이기 전에 기독교 신자로서의 문장이었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오히려 그에 걸 맞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시세와 문학을 동일선상으로 보고 있었던 그의 태도는 [기독교는 전부이지만 미술문학은 국부이다]라는 것에서 명확해 진다. 즉 기독교 신자로서의 태도를 중심으로 어차피 문학은 국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곧이어 문학자와의 관계를 개괄하여 보았다. 반골정신의 이미지를 갖고 청일전쟁의 승리라고 하는 시세에 편승한 우치무라의 이상적인 문학관은 당시의 문학청년들에게 주목을 끄는 것이었다고 본다. 특히 시라카바파의 문학자들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표방한 인류주의와 우치무라의 세계적 정신이 세상에서 보편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통하는 것이 있었다고 본다. 또 그의 곁을 떠난 많은 문학청년들은 문학자의 길을 선택함과 거의 동시에 기독교를 떠났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작품을 통해서 새로운 근대의 인간상을 창조하는 문학과 신을 창조주로 보는 기독교는 병행할 수 없다고 그들이 단정지어 버린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2)
- 小山内薫, "小山内薫全集 第八巻" (1933), 春陽堂
- 志賀直哉, "志賀直哉全集 第九巻" (1956), 岩波書店
- 志賀直哉, "志賀直哉全集 第十四巻" (1956), 岩波書店
- 遠藤周作, "父の宗教 : 文芸" (1968)
- 石原兵永, "身近に接した内村鑑三 下" (1973), 山本書店
- 鈴木範久, "内村鑑三をめぐる作家たち" (1981), 玉川大学出版部
- 内村鑑三, "内村鑑三全集 第一巻" (1982), 岩波書店
- 内村鑑三, "内村鑑三全集 第二巻" (1981), 岩波書店
- 内村鑑三, "内村鑑三全集 第三巻" (1983), 岩波書店
- 有島武郎, "有島武郎全集 第七巻" (1981)
- 有島武郎, "有島武郎全集 第十巻" (1982)
- 後藤亮, "正宗白鳥─文学と生涯 (復刻版)" (1994), 日本図書センタ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