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초기의 國邑과 6村
Guk-eup(國邑) and Six Villages(6村) in the Early Silla
0
조회
0
다운로드
15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이 글에서는 4세기 이전 신라 초기(斯盧國)의 國邑이 高墟村(沙梁部)과 楊山村(及梁部)으로 이루어진 二元的 구조였음을 살펴보았다. 건국시조 赫居世 이후 脫解尼師今까지 초기의 宮城이었던 金城은 高墟村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斯盧國을 구성하고 있던 6村 가운데 高墟村이 國邑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婆娑尼師今 22년(101) 月城이 새로 축조되고 王城으로 이용되면서, 國邑의 중심지는 月城이 위치한 楊山村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초기의 중심지였던 高墟村은 國邑의 제의적 중심지로 기능하며 계속 國邑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高墟村에는 赫居世와 관련된 始祖廟, 蘿井과 함께 赫居世의 妃인 閼英이 출현했던 閼英井 등 始祖 2聖을 기념하는 제사 유적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逸聖尼師今 5년(138) 金城에 政事堂이 설치되면서 阿達羅尼師今(재위 154~184년) 시기까지 다시 한동안 高墟村이 國邑의 중심지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伐休尼師今代에 月城의 宮殿을 수리하여 王宮으로 사용하면서부터 國邑의 중심지는 다시 楊山村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이 國邑의 중심지 金城과 月城을 오가게 되면서, 國邑의 범위는 자연스럽게 高墟村과 楊山村을 두 축으로 한 2部(沙梁部, 及梁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沾解尼師今 3년(249) 月城의 宮殿 남쪽에 南堂이 세워지면서 月城(梁部)은 더욱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을 강화하게 되었다. 한편 始祖廟, 蘿井, 閼英井 등 祭殿이 집중되어 있던 沙梁部는 더 이상 정치적 중심지로서는 기능하지 못했지만, 국가 祭儀의 중심지로서 國邑의 또 다른 기능인 제의적 기능을 지속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정치적 중심지와 제의적 중심지가 공존하는 현상은 고대 도시의 보편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신라 초기의 國邑이 高墟村(沙梁部)과 楊山村(及梁部)의 2部로 구성되어 있었던 점은 4세기 이후 신라의 王都가 6部로 정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王都가 5부(中·東·西·南·北部)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신라의 王都는 6부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신라 초기의 國邑(2部)에 주변 4方의 4村이 추가 편입되면서, 결국 王都가 6部로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國邑 2部에서 王都 6部로의 발전 시기는, 『三國遺事』 王曆에서 基臨尼師今 10년(307)에 “網羅四方”의 뜻에서 국호를 ‘新羅’로 정했던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基臨尼師今 10년에 국호를 다시 ‘新羅’로 바꾸었다고 하는 한편, 智證王 4년(503)에도 국호를 ‘新羅’로 정했다는 기록이 중복되어 나온다. 이에 대해 전자는 王都 6部의 정비와, 후자는 지방(城·村)의 정비와 관련된 국호의 선포라고 그 의미를 구분해 보았다.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a possibility that the early Silla(斯盧國)'s Guk-eup(國邑, prime town of a polity) had a dual structure comprised of Goheo-chon(高墟村 or Saryang-Bu; 沙梁部) and Yangsan-chon(楊山村 or Gŭpryang-Bu; 及梁部) before the fourth century. From Hyukgeose(赫居世), the founder of Silla, to Talhae(脫解) Isagŭm, the palace, Kŭmseong(金城) was conceivably located in Goheo-chon. This fact indicates that Goheo-chon was the center of political affairs among the six villages, of which Silla consisted. When Wǒlseong(月城) was built and used as a palace from the 22nd year of Pasa(婆娑) Isageum(A.D. 101), the center of Guk-eup was moved to Yangsan-chon, where the new palace was located. Yet the Goheo-chon's significance in the political affairs was not faded away, as it carried on its role as a ritual site. Thus it is supposed that the village was being included in the boundary the capital, since a progenitor's tomb and Na-jung(Na Well; 蘿井) was located in Goheo-chon, sites which had a strong connection to the founder of Silla. Additionally, there were ritual sites for Alyoung(閼英), the queen consort of Hyukgeose in the village. When Jungsadang(政事堂) was established in the fifth year of Ilsung(逸聖) Isagŭm(138), the Goheo-chon momentarily resumed its role of the political center until the reign of Adalla(阿達羅) Isagŭm. Still, Bulhyu(伐休) Isagŭm rebuilt the palace of Wǒlseong in the 13th year of his reign(196) and the center of Guk-eup returned to Yangsan-chon again. Hence, the bounds of Guk-eup embraced the two villages, while the center was shuttling between Kŭmseong and Wǒlseong. In the third year of Cheomhae(沾解) Isagŭm(249), Yangsan-chon fortified its role of the political center after establishing Namdang(南堂) on the southern region of Wǒlseong. Meanwhile, Goheo-chon, where once the progenitor's tomb, Na-jung, and Alyoung-jung assembled, could not perform the function of the political center anymore. Still, the village maintained its role as a center of ritual ceremony. This kind of phenomenon, a coexistence of a political center with a ritual center, is a universal structure for ancient cities. The characteristic that Guk-eup consists of two Bu(部), namely Saryang-Bu and Gŭbryang-Bu was a foundation for the structure that six Bu constitutes Silla's capital city(王都) after the fourth century. Unlike the capital cities of Koguryǒ and Paekch'e consisted of five Bu, Silla's included six of them. It is because, in addtion to the original two Bu, four more villages from four directions joined in the structure of Guk-eup like other countries, which originated the capital city with six Bu. The development from Guk-eup with two Bu to the capital city with six Bu was presumably the result at the early fourth century, considering the record that the name Silla(新羅) came from meaning "including all four sides(Manglasabang; 網羅四方)" in Samguk yusa. According to the Chronicles of Silla in Samguk sagi, there were overlapping records about the time when the name of the dynasty was officially decided. The first is the tenth year(307) of Girim(基臨) Isagŭm, and then the name was again proclaimed in the fourth year(503) of King Jijeung(智證). These repeated proclamations were, arguably, that the former implied the formation of the six Bu, while the latter meant reorganization of the local country into castles(城) and villages(村).
참고문헌 (80)
- 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1954), 東洋文庫
- 李鍾恒, "國民大學論文集" (1969)
- 文暻鉉, "新羅國 形成過程의 硏究", 大丘史學, 6 (1973)
- 文暻鉉, "신라의 건국과 사로 6촌" (2012), 경인문화사
- 全德在, "韓國六部體制硏究" (1996), 일조각
- 姜鍾薰, "신라상고사연구" (2000), 서울대학교출판부
- 이현혜, "고고학자료로 본 斯盧國 六村", 한국고대사연구, 52(52), pp.193~232 (2008), 한국고대사학회
- 의 형성과 발전, "역사와 현실", 1996, ~
- 朴洪國, "斯盧 6村의 위치에 대한 試論", 신라문화, (21), pp.259~282 (2003), 신라문화연구소
- 이부오, "신라의 건국과 사로 6촌" (2012), 경인문화사
- 全德在, "新羅 6部 名稱의 語義와 그 位置", 慶州文化硏究, (창간) (1998)
- 宣石悅, "新羅國家成立過程硏究" (2001), 혜안
- 徐毅植, "‘辰韓六村’의 性格과 位置", 신라문화, (21), pp.85~114 (2003), 신라문화연구소
- 文暻鉉, "新羅史硏究" (1983), 경북대 출판부
- "三國志"
- 李賢惠,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1984), 일조각
- 文昌魯, "三韓時代의 邑落과 社會" (2000), 신서원
- 金貞培,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1986), 고려대 출판부
- 박대재, "국가형성기의 복합사회와 초기국가", 선사와 고대, (38), pp.227~282 (2013), 한국고대학회
- 박대재, "고대한국 초기국가의 왕과 전쟁" (2006), 경인문화사
- 李炯佑, "사로국의 발전과 국읍의 변모", 國邑에서 都城으로(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005)
- 朱甫暾, "斯盧國을 둘러싼 몇 가지 問題", 신라문화, (21), pp.214~236 (2003), 신라문화연구소
- 崔在錫, "新羅의 六村·六部", 東洋學, 16 (1986)
- 全德在, "尼師今時期 新羅의 成長과 6部", 신라문화, 21(21), pp.283~313 (2003), 신라문화연구소
- 朱甫暾, "韓國社會發展史論" (1992), 일조각
-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박영사
- 전덕재,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내용과 신라 6부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한국고대사연구, (56), pp.85~129 (2009), 한국고대사학회
- 박성현, "신라 郡-城・村制의 특징과郡縣制로의 전환", 한국사연구, (163), pp.75~111 (2013), 한국사연구회
- "「명활산성작성비」(551)", ~
- "「창녕비」(561)", ~
- "梁書 新羅傳(521)", ~
- "三國史記"
-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1982), 일조각
- 李文基, "蔚珍鳳坪新羅碑와 中古期의 六部問題", 韓國古代史硏究, 2 (1989)
- 金哲埈, "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上)", 歷史學報, 1 (1952)
- 金元龍, "斯盧六村과 慶州古墳", 歷史學報, 70 (1976)
- 李基白, "新羅 六頭品 硏究", 省谷論叢, 2 (1971)
- 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 李純根, "新羅時代 姓氏取得과 그 意味", 韓國史論, 6 (1980)
-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박영사
- 鄭求福, "譯註 三國史記" (199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나희라, "신라의 국가제사" (2003), 지식산업사
- 權五榮, "三韓의 「國」에 대한 硏究", 박사, 국사학, pp.1996
- 권인한, "포항 중성리신라비의 어문학적 검토", 포항 중성리신라비 발견기념 학술심포지엄 (2009), 문화재청·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박성훈, "訓蒙字會注解", pp.226~ (2013), 태학사
- 弘字出版社編輯部, "最新弘字玉篇", pp.522~ (1984), 민중서림
- 藤田元春, "尺度綜考" (1977), 臨川書店
- 金秉模, "歷史都市 慶州" (1984), 열화당
- 藤島亥治郞, "朝鮮三國時代の都市と城", 日本古代史講座, 4 (1980), 學生社
- 姜鍾元, "新羅王京의 形成過程", 百濟硏究, 23 (1992)
- 金鎬詳, "新羅王京의 金城硏究", 慶州史學, 18 (1999)
- 황보은숙, "금성의 위치 비정", 신라문화, 34(34), pp.161~192 (2009), 신라문화연구소
- 최진녕, "경주 탑동 21-3·4번지 유적", 영남지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의회 2010년 연구조사발표회 (2010)
- 박윤정, "경주 쪽샘유적 발굴조사개요", 제32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2008)
- 尹武炳, "歷史都市 慶州의 保存에 대한 調査", 文化財의 科學的 保存에 관한 硏究, 1 (1972), 과학기술원
- 金廷鶴, "雁鴨池雜記(上)", 博物館新聞, 130 (1982), 國立博物館
- 박방룡, "都城·城址", 韓國史論, 15 (1985), 국사편찬위원회
- 南勝浩, "新羅 金城의 意味와 範圍", 대구사학, 74, pp.1~28 (2004), 대구사학회
- 文暻鉉, "新羅王京攷 新羅王京硏究",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995)
- "三國遺事"
- 東潮, "韓國の古代遺蹟" (1988), 中央公論社
- 김두진, "신라 六村長神話의 모습과 그 의미", 신라문화, 21(21), pp.1~21 (2003), 신라문화연구소
- 梁柱東, "朝鮮古歌硏究" (1965), 일조각
- 李炳銑, "韓國古代國名地名硏究" (1982), 형설출판사
- 이희준, "경주 황성동유적으로 본 서기전 1세기~서기 3세기 사로국", 신라문화, 38, pp.137~186 (2011), 신라문화연구소
- 李根直, "新羅 三姓始祖의 誕降地 硏究", 慶州史學, 16 (1997)
- 신창수, "신라의 왕경", 강좌 한국고대사, 7 (2002)
- 閔德植, "新羅의 慶州 月城考", 東方學志, 66 (1990)
- 金洛中, "新羅 月城의 性格과 變遷", 韓國上古史學報, 27 (1998)
- 「월성(月城)의 도성사(都城史)적 연구」 경주월성 (보존정비정책연구종합연구보고서), "김재홍",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2013)
- 김재홍, "신라 왕경의 개발 과정과 발전 단계", 韓國史學報, (52), pp.197~229 (2013), 고려사학회
- 崔光植, "新羅 上代 王京의 祭場, 新羅王京硏究",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995)
- 崔光植, "고대 한국의 국가와 제사" (1994), 한길사
- 국사편찬위원회, "中國正史 朝鮮傳 譯註" (1987), 국사편찬위원회
- 퓌스텔 드 쿨랑주, "고대도시-그리스·로마의 신앙, 법, 제도에 대한 연구-" (2000), 아카넷
- 朴恩用, "「始林」表記의 原語推定", 韓國傳統文化硏究, 1 (1985)
- 박대재, "의식과 전쟁-고대 국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2003), 책세상
- 이기봉, "新羅의 建國 前後 六村과 그 傳統에 대한 地理的 檢討", 문화역사지리, 15(2), pp.1~20 (2003),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 이기봉,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2007), 푸른역사
- 文暻鉉, "迎日冷水里新羅碑에 보이는 部의 性格과 政治運營問題", 韓國古代史硏究, 3 (19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