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 실천으로서의 불교미술 - 석굴암, 불국사 창건 목적과 관련하여
Filial Piety and Buddhist Art: In relation to the Patronage of Seokkuram and Bulgu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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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대 한반도에서 전개된 다양한 형태의 불교미술을 “효의 실천”이라는 키워드로 재조명함으로써 석굴암(石窟庵), 불국사(佛國寺)의 창건 목적을 재고하려는 시도이다.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현 석굴암)를 지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학자들은 두 절의 창건 목적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대표적인 견해 중 하나는 호국(護國) 사상에 기반해 두 절이 왜(倭)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지어졌다고 보는 것이며, 이 견해는 두 절을 신라 왕실을 위한 국찰(國刹)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맥을 함께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삼국유사』에 제시된 김대성 개인의 효(孝)의 실천은 공공연하게 부정되기도 했다. 본 논문은 호국 및 국찰설을 비판한 근래의 수정주의적인 시각을 따라 창건주로서의 김대성을 주목하되, 석굴암, 불국사의 창건 목적을 당시 왕실 및 신라 귀족들의 추복(追福) 행위, 그리고 그와 연관된 토함산 일대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재고했다. 7세기 중엽부터 석굴암, 불국사가 창건되기 시작한 8세기 중엽 사이 낭산(狼山)에서부터 시작해 토함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공간에 왕릉을 비롯한 주요 고분들이 형성되었음을 주목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 선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행해진 다양한 불사(佛事)의 흔적들이 남아 있음을 지적했다. 이를 통해 당시 토함산 일대는 중대 왕실 및 신라 귀족들에게 추복의 의미가 있는 장소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당대 최고의 귀족이었던 김대성이 부모를 위한 사찰을 발원하며 그 입지로 토함산을 선정한 이유를 효의 실천이라는 본래의 의미와 연결해 고찰해보았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reconsider the purpose of the construction of Seokkuram and Bulguksa by examining how the relationship between filial piety and Buddhist art in ancient Korea progressed. Although Samguk yusa(Memoriabilia of the Three Kingdoms) contains a phrase, “Kim Daeseong built Bulguksa on behalf of his present parents, and Seokkuram of his past parents,” scholars have suggested different explanations. One of the dominant opinions is that the temples were made on the purpose of protecting Silla against the invasion of Japanese Wae. This one is closely linked with other opinion that the two monuments are national temples, rather than Kim’s private ones. In the course of understanding the background of Seokkuram and Bulguksa in this way, Kim’s intention of fulfilling filial piety has been neglected. This paper embraces the record of Samguk yusa following recently emerged revisionist views and reexamines Kim’s purpose of patronizing Seokkuram and Bulguksa by considering the meaning and function of Mount Toham during the eighth century. I point out that Mount Toham area served as a place for significant burials where royal and aristocratic tombs were created in the eighth century. I also indicate that Buddhist activities for commemorating deceased parents were active in the vicinity of Mount Toham at the same period. Based on these observations, this paper suggests that Mount Toham was perceived by royal and aristocratic families as a place for fulfilling their filial piety. It also argues that such a perception serves as the reason why Kim, who was the highest noble at the time, chose Mount Toham as a place for commemorating his parents by way of patronizing Buddhist tem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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