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의 삼국통일전쟁과 해양ㆍ호국 - 東海口 장례의 史的 전제
King Munmu from the perspective of the ocean and the country during the period of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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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고는 신라 문무대왕과 해양ㆍ호국의 관계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삼국통일전쟁의 완수 과정에는 수군을 동원한 당군의 축출과 왜군의 제압이 필수적이었으며 또한 그만큼 수군과 해양의 중요성이 재인식된 시기였다. 문무왕 3년(663)에 船府署의 卿 2인 설치와 동 18년의 船府 別置을 둔 것은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아울러 船府(署)의 병부로부터의 이탈은 船府(署)卿 설치 단계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지적하였다. 문무왕의 장례에 관해서는 현재 散骨說과 藏骨說이 있는데 어느 쪽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쉽게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문무왕의 사망 직후에 만들어진 “신라문무왕릉지비”가 예컨대 태종무열왕의 “太宗武烈大王之碑”와 달리 ‘왕릉’의 비로 명기하고 있는 점은 당시 신라인이 문무왕의 무덤에 대해 ‘왕릉’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산골이든 장골이든 간에 문무왕=해중 왕릉이라는 인식은 이미 당대의 인식으로서 성립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문무왕의 호국 의지에 관해서는 종래 감은사-호국용-대왕암-“欲鎭倭兵”으로 연결되는 서사 구조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필자는 “문무왕릉지비”가 사천왕사 앞에 立碑된 점, 생전의 문무왕의 호국 의지 피력이 사천왕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점, 실제 사천왕사를 조영한 이가 또한 문무왕 자신이란 점 등을 근거로 감은사-“欲鎭倭兵”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사천왕사-전방위 수호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문무왕의 실제 염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당시 신라 수호에서 가장 당면 적국은 당이며 왜국은 그에 비하면 부차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문무왕의 호국 의지는 일차적으로는 당을 향하는 것이었으며 그런 염원은 사천왕사 건립과도 맞닿아있는 것이었다. 문무왕 생전에 미완에 그친 감은사(진국사)의 조영 의도에 왜국에 대한 제어 심리가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국에 대한 방비는 四方에 대한 방비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사천왕 신앙적인 호국관과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문무왕에게 동해가 갖는 의미는 왜국 방비가 아니라 國都 경주의 지근거리의 바다에서 신라를 수호하겠다는 점에 보다 본질적인 무게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Abstract
This paper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King Munmu of Silla and the maritime and patriotism. In the process of completing the Three Kingdoms Unification War, the expulsion of the Tang army and the suppression of the Japanese army by mobilizing the navy were essential, and it was a time when the importance of the navy and the sea was re-recognized. The maintenance of Seon-bu (Government office for Vessel) by King Munmu can be understood from that point of view. Regarding the funeral of King Munmu, there are currently two opinions, sowing bones or Keeping bones. However, the fact that the “Silla Munmu's Royal Tomb Monument,” which was created shortly after King Munmu's death, stipulates it as a monument to the Royal Tomb shows that the Silla people at that time recognized the tomb of King Munmu as a “king tomb.”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perception that King Munmu's tomb was the underwater royal tomb was already established as a perception of the time. In addition, Considering the relationship between King Munmu and Sacheonwangsa Temple,I think it is reasonable to understand King Munmu's will to protect the all directions through Sacheonwang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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