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관왕묘 향유의 두 양상
Two Aspects of the Meaning of the Shrine of Guan Yu in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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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조선에서 관우를 기념하는 사당[關王廟]이 처음 생긴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그러나 거의 100년 동안 관우의 영험함을 빌려 개인적 복을 구하는 사람들만 즐겨찾는 장소였다. 선조가 처음 이 곳을 찾을 때 왕이 무묘에 찾아가는 예를 차용했고, 이후 국가 祀典에 포함되어 제향이 이루어졌지만 그 제향이 갖는 국가적 의미는 불확실했다. 이 장소는 숙종대에서 정조대에 이르는 동안 국가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숙종은 관우를 忠義와 尊周의 아이콘으로 해석해냈다. 당시 왕조의 수복을 위해 노력하며 時勢보다는 정의正義를 중시했던 촉한을 가장 정통성이 있는 나라로 여기는 ‘촉한정통론’의 역사의식은 『삼국지연의』라는 책을 통해 조선에 더 널리 퍼졌다. 숙종은 관우의 충성심을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 보편적인 정의를 지향하는 차원에서 재정의했다. 관우는 단지 무력이 뛰어난 무장이 아니라 『춘추』라는 책을 즐겨 읽었던 정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장수였고, 시대를 뛰어넘어 기억할 만한 ‘武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영조와 정조는 관왕묘를 조선의 무묘로 정립시켰다. 숙종과 마찬가지로 관우를 형세에 굴하지 않고 오롯이 漢 왕조의 회복을 위해 몸바친 이로, 춘추 의리의 상징으로 기념했다. 무묘에서 절하는 무장들과 군사들에게 관우를 본받아 무력이 사적 이익과 權勢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고 보전하는 데에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숙종~정조에 이르는 시기는 군사 방면의 업적이 조선의 어느 시기보다도 두드러진 시기였다. 왕조는 의리에 바탕한 무의 상징으로 관우를 재정립시키며 그의 사당에서 조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무’를 설득했다. 내부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정치로 관왕묘에서의 설득에 설득력을 더하는 일은 왕조의 몫이었다. 19세기 역사 속에서 관왕묘 의례는 지속되었지만, 관왕묘의 18세기적 상징성은 점차 희미해졌다. 관왕묘는 다시 사적인 무당집으로 변해갔고, 끝내는 국가가 스스로 관왕묘를 왕실의 안녕을 위해 맹목적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관왕묘는 더 이상 국가의 안위와 무관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Abstract
The shrine of Guan Yu[關王廟] was built during Imjin War in Joseon Dynasty. However, for nearly hundred years, anyone looking for their own fortune could enter this place. During the period of Sukjeong to Jeongjo, this place could nationally have new meaning. Sukjeong interpreted Guan Yu as an icon of loyalty and appraise to Zhou dynasty[尊周]. The historical sense of ‘Shu Han orthodox theory[蜀漢正統論]’ -which regards Shu Han as the state having the most legitimacy- permeated through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Sukjeong redefined the loyalty of Guan Yu as universal justice beyond nations, not as the obligation to monarch. Guan Yu was not only a general who was armipotent but also a general who enjoyed reading “Annals of Spring and Autumn” and could give his life for justice. He could be acknowledged as the symbol of military power transcending times. Yungjo and Jeongjo reformed shrine of Guan Yu as temple of military. They commemorated Guan Yu as the general who devoted himself to the recovery of Han dynasty without submitting to the situation and power- the symbol of loyalty. They tried to manifest that military power should be used to found and preserve righteous country through the temple, the same as Sukjeong. In the period of Sukjeong to Jeongjo the military capability of Joseon was remarkable than any other period in Joseon. The dynasty convinced a desirable ‘military power’ in the shrine of Guan Yu by redefining him as a symbol of military power based on loyalty. Though the ceremony of Guan Yu lasted in 19th century, the symbolical meaning of 18th century became faint. The shrine of Guan Yu again changed to shaman house, and at last, the dynasty itself made the shrine where they pray blindly for the stability of royal family. The shrine of Guan Yu was no more related to the safety of the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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