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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 고구려 안시성 인식과 ‘城上拜’ -「연행록」과 「문집」을 중심으로-

17~19世纪高句丽安市城观念的演进与‘城上拜’ -以「燕行录」与 「文集」为中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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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高句麗 安市城은 645년 唐 太宗의 고구려 침략 시 唐軍의 공격을 막아내었을 뿐만 아니라, 당 태종에게 부상을 입혔다는 전승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 입장에서는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中國 遼寧省 海城市 八里鎭에 있는 英城子山城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며 근래 요녕성 大石橋市 周家鎭에 있는 海龍川山城에 비정하는 의견도 제출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요녕성 鳳城市 鳳城鎭에 있는 鳳凰山城이 고구려 안시성이라는 견해가 연행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17세기 말에는 안시성이 開平縣 인근에 있다는 기록을 따라 봉황산성은 안시성이 아니라 부정하는 견해가 나오고, 이에 대한 재반박이 나오는 등 18세기와 19세기 중엽까지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그러한 논의의 내용과 배경에 대한 검토 결과 봉황산성과 고구려 안시성을 최초로 연결하여 본 사람은 그간의 통설처럼 1610년에 사행한 趙緯韓이 아니라 1609년에 사행한 柳夢寅이라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 이후 南九萬이나 徐有聞처럼 안시성의 실제 위치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구체적으로 피력한 경우도 나오게 되었다. 이렇듯 연행록의 저자들이 안시성을 기록한 이유에는 연행 노정에서 예외 없이 만나게 되는 사적이라는 점, 먼저 연행한 사람들의 기록을 참고하였다는 점, 반복적으로 연행에 참가한 역관․역졸 같은 수행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보지만, 그 바탕에는 고구려사, 나아가 한국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생각된다. 한편 안시성 전투와 안시성주에 대한 관심이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었던 것은, 의리를 근본으로 하는 중화주의의 계승자로 자처한 17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안시성주의 ‘城上拜’라는 행위가 중화질서의 회복을 꾀하는 자신들의 지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正統論과 尊周論의 입장에서 정통왕조인 명나라와 명나라 황제에 대한 자신들의 의리 관념을 안시성주의 성상배에 투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Abstract

高句丽安市城不仅在645年唐太宗进犯高句丽时抵挡住了唐军的进攻,而且让唐太宗蒙受身负箭伤的奇耻大辱,这虽然不过是传闻其真实与否我们不得而知,但这足以表明对于高句丽而言安市城可谓是胜利的象征。现在学术界普遍认为位于中国辽宁省海城市八里镇的英城子山城为安市城故地,近年来也有人提出位于辽宁省大石桥市周家镇的海龙川山城才是安市城的新见解。然而在17世纪以后的朝鲜王朝时期出使中国使臣所写的燕行录等多数文集里反复提及到,位于今天辽宁省凤城市凤城镇的凤凰山城是高句丽安市城。到了17世纪末,又有一些文人反驳此论即凤凰城为安市城,因史籍记载安市城临近开平县。对此又有一些再反驳之论。总而言之,直至18∼19世纪中叶,有关安市城位置的争执并未中断。本文仔细分析了此争议的时代背景,结果发现最初把凤凰山城视为安市城的人并非通常所说是1610年出使中国的赵纬韩,而是1609年出使的柳梦寅。其后像南九万或徐有闻等人,也有一些文人开始提出了关于安市城具体位置的独到见解。燕行录之类文集里普遍提及安市城的主要原因有以下几点,其一,出使燕行路程无一例外要经过此遗迹,其二,参照前人燕行之记录,其三,多次参与出使中国的一些译官及驿卒等随从人员口述中得知有关信息。尽管如此归根到底这些出使文人们提及安市城的真正原因无外乎他们非常关注高句丽史乃至韩国上古史。壬辰倭乱以后,朝鲜文人们对安市一役与安市城主的关注并未消退,因为他们以中华主义继承者自居,视义理为立身之根本,在他们眼里安市城主所行的所谓‘城上拜’之行为,即代表他们所追求的中华秩序的回归。按照正统论与尊周论的观念,很可能当时朝鲜文人们透过书写安市城主的‘城上拜’欲抒发自己对正统王朝大明与大明皇帝的义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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