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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8년(공민왕 7) 李穡의 摩尼山 紀行과 塹城壇 醮禮

Yi Saek's journey to Mount Mani and sacrifice at Chamseongdan in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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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이색은 20대 초반부터 고려와 원의 同文意識은 물론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존인식인 東人意識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중층적인 의식은 깊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색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씨[단군]에서 시원하는 고려 역사의 유원성을 자부하며 관인으로서 국가의 계책에 게을리 할 수 없음과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고려라고 하여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 자신이 나라에 몸 바치는 것은 현명한 임금 때문이라고 하여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참여하고 고려의 사직이 무너지지 않을 방법을 찾는데 골몰했다. 그가 본 참성단에 펼쳐진 산하의 장대함은 고려 사직의 장대함 그것이었다. 여기서 그는 초례를 주관하며 청사를 고하고 소지하며 고려의 태평년을 소망했다. 이색은 유학자로서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초례를 주관한다는 점을 출발 전이나 재계하면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초제를 마친 후의 심정은 홀가분했다. “얻음이 있는 듯하여 기쁜 마음이지만, 말로 전하지 못하여 애석하다”는 점에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재궁을 출발하면서는 “돌아가는 안장에 長生福을 가득 실어 우리 왕께 바치어 태평성대를 이룩케 하리”라는 의지를 밝혀 초례에 만족감을 표하고 있다. 그가 참성단 초례를 주관할 향사로 마니산을 찾은 것은 1358년(공민왕 7) 가을이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적극 추진되었던 때였다. 이런 시점에서 이색이 참성단 초례를 주관하고 있음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공민왕은 역시 왕정복고를 위해 원의 친행을 결행하려고 참성단 초례를 지낸 원종의 일을 우선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매년 거행되었던 참성단 초례를 통해 개혁과 중흥의 의지를 다잡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이색에게 그 일을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이색의 마니산 기행은 이런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배경과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향후 원과의 관계에서 신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지지하고 이끌 그의 입장에서, 조선씨에서 출발하는 역사인식에 토대하여 참성단에서 그 의지를 다졌다는데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Abstract

From his early 20's, Yi Saek had an awareness of both the commonality of the Koryo and Yuan cultures and a sense of pride in his own Korean culture and history. This duality of thought was not confirned to Yi Saek; it was rather the universally held view of Goryeo intellectuals at the time. Thuys, the official, while feeling pride in the uniqueness of Goryeo from the time of Tangun's construction of the Korean nation, does not neglect his country's plans. He held that a kind sacrifices body and soul to his country, because the king is wise and praised King Gongmin's reform policies as he devoted himself to finding ways to keep Goryeo’s sovereignty from failing. The view of the countryside spread out before him as he looked down from Chamseongdan was to him the beauty and magnificence of Goryeo itself. He observed the sacrificial ceremony and reported on elegiac rites of burning paper while hoping for peaceful times. As a Confucian scholar, Yi Saek stated that the act of approaching the sacrificial ceremony with a distracted heart would betray itself before its observance or during the purification rituals. Once the official had completed a ceremony, however, he would be lighter in spirit: “I feel joyful, as if I’ve received a blessing, but because I cannot express it in words, I feel sadness.” Through these words, we can know his thoughts on the matter. Also, as he departed from Jaegung, he uttered his phrase expressing satisfaction with the sacrificial rites:“As we return to the court, let us be filled with the happiness of long life and dedicate our lives to the king in order to institute a peaceful reign.”It was in the fall of 1356, when Yi Saek sought out Mount Mani to perform the sacrificial ceremony. By this time, King Gongmin had instituted a policy of aggressive reform. Yi Saek’s performance of this ceremony at Chamseongdan during this period enables us to attach great significance to the act. Likewise, King Gongmin’s efforts to restore the kingdom through of the Yuan dynasty’s travels brought to mind King Wonjong’s original ceremonial sacrifice on Chamseongdan. From this point on, the king saw the annual sacrificial ceremonies on Chamseongdan as necessary to emphasize the intentions of reform and revival. He entrusted this work to Yi Saek, placing him in charge. Against this background of consciousness of the reality of the situation, Yi Saek created his travelogue dealing with his journey to Mount Mani. His intentions were rooted in taking the initiative in supporting King Gongmin's reformist politics while strengthening and implementing this support through the ceremony at Chamseongdan, based, as they were, on his sense of historical consciousness encompassing his nation’s entire history dating back to Tan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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