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代东北诸族的内附与突厥
唐代 東北 諸族의 內附와 突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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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唐代,통상 주변에서 내속해 온 부족 혹은 국가에 대한 관리방식은 羈縻州였으며, 기미주의 건립은 당과 정치 예속 관계의 건립을 의미한다. 太宗 貞觀 20년(646) 薛延陀가 멸망하자, 당은 漠北의 鐵勒 여러 종족으로 府州를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都護府를 설치하여 監領함으로써 漠北 지역을 직접 통제하였다. 그래서 동북에서 漠北遊牧民族과 唐의 대항관계를 종식하였다. 거란의 李盡忠과 孫萬榮의 반란으로 突厥의 黙啜은 가장 큰 이익을 보았는데, 黙啜은 이를 통해서 실력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동북의 여러 종족이 돌궐에게 依附하였다. 거란 역시 더 이상 독립적인 정치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돌궐에게 依附하였다. 奚와 霫도 돌궐에 依附하였다. 李盡忠과 孫萬榮의 반란은 營州都督府와 安東都護府의 후퇴를 야기하였으며, 당은 幽州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서 節度使를 설치하였다. 당대 幽州는 후방의 지원지가 되고, 營州는 전진 기지로 양자는 표리 관계였다. 그렇지만 幽州는 오랜 기간 동안 돌궐의 위협 아래에 있었으며, 幽州節度使 역시 그들의 견제를 받아 동북 지역을 전력해서 경영할 수 없었다. 契丹과 奚는 묵철이 패망한 후에야 비로소 당에 내부할 수 있었다. 玄宗 開元 연간 突厥 내부에 변고가 발생해 登利可汗이 즉위하고, 그는 契丹과 奚를 쳤으나 패하였다. 이 시기 營州都督은 契丹, 奚, 渤海, 黑水四府經略使를 겸임하고, 天寶 원년(742)에는 平盧節度使가 室韋, 靺鞨등을 진무하니 經略 혹은 鎭撫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당의 동북 지역 경영은 큰 진전을 보았다. 돌궐과 당의 동북 지역 경쟁이 점차 줄어들자 室韋, 黑水의 여러 부족은 다시 당으로 귀부하였다. 이런 동북 지역의 변화는 渤海에도 영향을 주었다. 현종 개원 23년(735) 발해의 大武藝는 契丹과 奚를 공격하자는 돌궐의 사신을 억류하여 돌궐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당과의 관계는 안정되어 갔다. 동북 여러 민족의 당으로의 내부는 각자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과 돌궐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고, 특히 동북 지역에서 契丹과 奚의 관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참고문헌 (9)
- 谭其骧, "唐代羁縻州述论 in: 长水集续编" (1994), 人民出版社
- 陈寅恪, "唐代政治史述论稿", pp.125~ (1997), 上古籍出版社
- 蔡美彪, "契丹的部落组织和国家的产生", 历史研究, pp.170~171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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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刘统持异议, "唐代羁縻州研究", pp.101~ (1999), 西北大学出版社
- 关于后突厥的复兴, "参见李方·后东突厥汗国复兴", 中国边疆史地研究 (2004)
- 蔡美彪, "契丹的部落组织和国家的产生", 历史研究, pp.172~ (1964)
- 马一虹, "渤海与后东突厥汗国的关系", 民族研究 (2007)
- 中村裕一, "唐代制敕研究·之·论事敕书的传达", 汲古书院 (19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