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반 대둔사 승려의 일본 표류와 일본인- 楓溪賢正의 日本漂海錄을 중심으로 -
The Drifting in Japan and Recognition for Japan of a monk of Daedunsa in the 19th century - Based on the “Japanpyohaerok” of Punggye Hyunch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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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日本漂海錄』은 1817년(순조 17) 일본 九州에 표류한 승려 楓溪 賢正이 1821년에 저술한 표류기이다. 조선시대 승려가 쓴 유일한 일본표류기로서 희귀하며, 일본에서의 견문사항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楓溪 賢正은 광주의 元曉寺에 있다가 1817년 해남 大芚寺의 고승이었던 玩虎 倫佑의 초빙을 받아 千佛像 제작에 참여하였다. 그는 1817년 가을 경상도 경주 기림사에서 천불상을 만들어 대둔사로 돌아오던 중 11월 25일 동래앞바다에서 일본으로 표류해, 1818년 6월 17일 귀국하기까지 일본에서 7개월 간 체류하였다. 그는 귀환 후 1821년 7월 일본 표류시의 체험과 견문을 바탕으로 『일본표해록』을 저술하였다. 『일본표해록』은 기본적으로 ‘漂流日記’의 형식이지만 중간에 견문을 항목별로 정리한 ‘聞見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표류일기뿐 아니라 문견록 부분의 곳곳에 그의 일본인식이 선명하게 피력되어 있다. 체재나 서술형식에는 세련성이 다소 부족하지만 묘사의 사실성과 생동감은 뛰어나며, 견문을 바탕으로 기술한 ‘문견록’은 내용이 충실하다. 풍계대사는 長崎에서 견문한 바를 19개의 항목에 걸쳐 정리하였는데 그의 일본인식의 특징적인 면을 정리해 보면, 첫째, 일본 경제의 번성함을 인정하면서, 국제적인 무역항구 長崎의 富와 번화상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상가와 관청은 물론 개인의 가옥이나 일상생활도 조선보다 훨씬 호화롭다고 보았다. 둘째, 일본인의 기질과 풍속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단지 대마도의 풍속에 대해서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셋째, 일본의 학술과 문화에 대해서는 경제와 달리 낮게 평가하였다. 넷째, 일본인의 조선인식에 대해 그는 일본인들이 매우 우호적이고 우리나라를 존경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난 소수의 사람들이 보여준 조선문화에 대한 동경과 우호적인 태도를 보고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볼 때 풍계대사의 일본의 풍속에 대한 인식은 수용적이며, 華夷觀에 입각한 日本夷狄觀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통신사행 파견 시 보이는 조선지식인의 문화우월감이나 그 과정상에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국가 간의 경쟁의식 같은 것은 표출되지 않았다.
Abstract
『日本漂海錄』は、1817年(纯祖17)日本九州に漂流した僧侶楓溪賢正が1821年に著した漂流記である。朝鮮時代の僧侶が書いた唯一の日本漂流記としてまれであり、日本での見聞を詳細に記述しており、非常に重要な資料である。楓溪賢正は、光州の元曉寺にいたが、1817年に海南大芚寺の高僧であった玩虎倫佑の招聘を受け、千佛像制作に参加した。彼は1817年の秋、慶尙道慶州祈林寺から千佛像を作成し大芚寺に戻ってきた中、11月25日東莱沖から日本に漂流して、1818年6月17日に帰国するまで、日本で7ヶ月間の滞在した。彼は帰還後、1821年7月、日本の漂流時の体験と見聞をもとに、『日本漂海錄』を執筆した。 『日本漂海錄』は、基本的に「漂流日记」の形式ですが、途中で見聞を項目別にまとめた「闻見錄」が含まれている。しかし、漂流日記だけでなく、闻見錄部分の所々に彼の日本の認識が鮮明に表明している。滞在や記述形式には、洗練性がやや不足するが、描写の事実性と躍動感は優れており、見聞をもとに記述した闻見錄は、内容が充実している。楓溪大師は長崎で見聞したところを19個の項目にわたってまとめられたが、彼の日本認識の特徴的な面を整理してみると、まず、日本経済の繁盛を認めつつ、国際的な貿易港長崎の富と繁華像に感心を禁じえなかった。商街と官厅はもちろん、個人の家屋や日常生活でも朝鮮よりはるかに贅沢であるとみた。第二に、日本人の気質と風俗について肯定的に評価した。ただ對馬島の風俗につきましては非常に否定的だった。第三に、日本の学術や文化については、経済とは異なり、低く評価した。第四に、日本人の朝鮮認識について彼は、日本人が非常に友好的であり、韓国を尊敬するという認識をしていた。自分が出会った少数の人々が見せてくれた朝鲜文化への憧憬と友好的な態度を見て、一般的なものと考えた可能性が高いとされる。全体的に見ると、楓溪大師の日本の風俗の認識は受容的であり、華夷観に立脚した日本夷狄観はあまり見られない。通信使行派遣時に見える朝鮮知識人の文化優越感や、その過程上にみなぎる緊張感を感じさせてくれる、国家間の競争意識のようなもの表出されてい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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