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으로 본 交隣儀禮 -1811년 신미통신사 파견시 예물 교환을 중심으로-
経費から見た交隣儀礼 -1811年辛未通信使派遣時の礼物交換を中心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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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조선시대 교린(交隣) 외교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통신사의 일본 파견에 대해 한일 양국에서는 주로 정치적인 득실이나 문화적 영향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의 통신사들이 일본에 가서 6개월〜1년 정도를 체류하면서 치루는 각종 외교의례를 비롯한 일본측의 접대란 사실은 하나하나의 외교행위에 각각 경제적 행위가 수반되는 것이었다. 조일 교린관계란 서로간에 ‘대등’을 이념으로 하는 외교관계라 할 수 있는데, 이 관계를 유지하지 위해 서로간에 과연 얼마만큼의 비용(費用)을 필요로 했는지, 이 ‘비용’이라는 관점에서 근세 한일관계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1811년의 신미통신사를 대상으로,첫째, 조일간에 서로 예물을 주고받는 외교 상대는 어떤 사람들이며,둘째, 조선의 통신사들이 가지고 간 예물의 품목과 수량은 어느 정도였는지,세째, 이에 대해 일본측이 준비하는 회답예물의 품목과 수량,넷째, 일본측의 회답예물 가격의 산출과 선정 기준은 무엇이었는지 등,예물 교환이라는 외교의례 행위를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해 봄으로써, 예물의 교환이 근대 이전 교린외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1811년의 신미통신사 때 공・사예단을 예로 들면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가져오는 예단(人参・虎皮・鷹・木綿 등)에 대해 품목마다 단가를 계산하여 그 총 액수에 상응하는 물건과 수량을 회답예물(色琥珀・水洗い・茶罐・蒔絵提重 등)로 주었다. 수량면에서 볼 때 1811년의 신미통신사는 조선측 예단 보다 일본측 회답예물 총액이 조금 더 많았다. 즉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어느 쪽도 크게 손해보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회답예물의 품목은 그것을 지급하는 일본쪽의 사정에 따라 품목이 임의로 정해지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19세기 초 花鳥雲鶴의 무늬가 들어간 吉祥文様을 선호하는 조선측의 취향이나 수요를 충분히 고려한 것이었다. 단 회답예물 품목에 대해서는 일본측에서는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조선측의 인식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었다. 더욱이 상대방에서 그 품목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접대를 충분히 받지 못한 것으로, 즉 손해보는 것으로 인식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조일 교린 관계에서 통신사 파견에 수반되는 예물 교환이라는 외교의례는,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同等價’를 전제로 한 경제행위였으며, 정치・외교상 어느 쪽도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Abstract
朝鮮時代、交隣外交の象徵としてみなされてきた通信使の日本派遣について、韓日の両国では、おもに政治的な視点、あるいは文化的側面から關心がよせられてきた。しかし、朝鮮の通信使一行は日本に6ヶ月〜1年という長期にわたって滞在する。その間に行われる外交儀礼や日本側の接待とは、実は多大の経済的営為行為を伴うものであった。ところが、これまでそうした側面についての研究はなされていない。朝・日間の交隣関係とは、互いに「対等」を理念とする外交関係であるといわれている。この関係を維持するために、朝鮮と日本は、互いにどれだけの経費を必要としていたのか、経済的支出の観点から近世の朝日関係を考察する必要がある。本稿は、1811年の辛未通信使を対象に、第一、朝日間で礼物を交換する外交相手はどのような人々であり、第二、朝鮮通信使が持参した礼物の品目と数量はどの程度であり、第三、これに対する日本側の回答礼物の品目と数量はどの程度であり、第四、日本側の回答礼物の価格算出と選定基準はいかなるものであったか、など、礼物交換という外交儀礼行爲を、「経費」という経済的側面から検討することによって、近代以前の交隣外交の歴史的な意義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検討の結果、得られた結論は次の通りである。1811年、辛未通信使の際、日本では朝鮮の使節が持参した公・私の「礼単」、たとえば、人参・虎皮・鷹・木綿などに対して、品目ごとに価格を逐一調べ、その總額に値する物品(色琥珀‧水洗い‧茶罐‧蒔絵提重など)を「回答礼物」として返していたことである。このとき、総額のうえでは、日本側の負担額が朝鮮側の礼単額よりはやや多かったが、その差はそれほど大きいものではなかった。「経費」という側面からは、朝鮮と日本のどちらかが一方的に大きな負担を負うほどのものではなかった。また、「回答礼物」の品目については、それを用意する日本側の事情によって品目が定められる傾向はあったものの、比較的、19世紀初頭における、花鳥雲鶴の吉祥文様を好む朝鮮の人々の趣向や需要を考慮したうえのものであったといえよう。これは注目すべき点である。ただし、回答礼物の中には、日本では重要視されていても、朝鮮側からは軽視される品物もあった。そうした場合、朝鮮側にしてみると、「回答礼物」は軽度の品物であり、今回はじゅうぶんな接待をうけなかったと認識する場合もあったといえる。しかし、それにもかかわらず、結論的にいえることは、朝・日間の交隣関係において、通信使の派遣にともなう礼物交換という外交儀礼を、「経費」という観点からみると、「等価」を前提とした経済行為であり、政治‧外交のうえでも、朝・日のどちらかが上位に立つといった、一方的な関係では決してなかったこと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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