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의 일본인식과 귀국보고
金誠一の日本認識と歸國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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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본 연구에서는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1590년 庚寅通信使行의 귀국보고에 대해 기존의 黨爭論的 視角에서 접근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사상사적으로 접근하였다. 使行中 三使 간의 대립과 갈등도 각자의 세계관과 철학에 바탕을 둔 對外認識과 日本觀의 相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본론에서 副使 金誠一이 正使 黃允吉의 보고와 달리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부인한 이유를 6가지 정도로 추론해 보았다. 김성일이 일본의 침입 동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허물은 인정해야 하겠지만, 임진왜란 勃發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기존의 일부 견해는 사실적 기반이 취약하다. 사실 일본의 침략가능성에 대해서는 귀국보고 외에도 다른 정보루트가 아주 많았다. 1588년 이래 대마도주 宗義智와 玄蘇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고가 이미 있었다. 또 1591년 2월 내년에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玄蘇의 말을 전한 宣慰使 吳億齡의 보고가 있었고, 윤3월에는 왕명으로 황윤길과 김성일이 東平館에서 玄蘇를 만났을 때 역시 豊臣秀吉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고를 하였다. 5월에는 대마도주 宗義智가 부산에 와서 邊將에게 침략을 통보하였다. 사신들이 가져온 秀吉의 답서 또한 사실상 宣戰布告나 마찬가지인 내용으로 노골적으로 침략의사를 밝혔다. 이밖에 明으로부터도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을 쳐들어온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1591년 네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해 일본과의 연합설에 대한 해명과 일본의 動態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요컨대 1591년 2월 사신들의 귀국한 이후 모든 추가적 정보의 내용은 침략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침략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다. 결국 일본의 침략가능성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은 宣祖와 朝廷大臣이 하는 것이다. 귀국보고 이후에도 거듭되는 침략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조정의 분위기를 보면, 김성일의 보고만으로 사태가 진행되었거나, 문제가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김성일의 귀국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조정 전체의 책임인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자 희생양이 필요하였다. 선조뿐 아니라 조정대신 모두의 책임면제를 위한 희생양으로 김성일이 선택된 셈이다.
Abstract
本研究では、壬辰倭乱の直前に日本へ派遣された1590年の庚寅通信使行の帰国報告に対し、既存の党争論的視点での接近方式を脱して、思想史的接近を試みた。また、使行中における三使間の対立と葛藤も、各自の世界観と哲学を土台とした対外認識と日本観の相違から出たものと捉えた。 本論において、副使ㆍ金誠一が正使ㆍ黄允吉の報告とは異なり、日本の侵略可能性を否定した理由を6つほど推論した。金誠一が日本の侵入動静を正確に把握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咎は認めるほかないが、壬辰倭乱勃発の責任を彼に負わせる既存の一部見解は、事実的基盤が脆弱である。 実際、日本の侵略可能性に関する情報ルートは、帰国報告以外にも多く存在していた。1588年以降、対馬島主ㆍ宗義智と玄蘇による警告が何回もあった。また、1591年2月には、来年日本が侵略するはずであるという玄蘇の言葉を伝えた宣慰使ㆍ呉億令の報告もあったし、閏3月に王命によって黄允吉と金誠一が東平館で玄蘇に会った時にも、やはり豊臣秀吉が戦争を起こすはずであるという予告がされていた。5月には、対馬島主ㆍ宗義智が釜山に来て、辺将に侵略を通報し、使臣らが持って来た秀吉の答書も、事実上の宣戦布告とも言える内容であり、露骨に侵略の意志を明らかにしていた。その他、明からも、朝鮮が日本と連合して明に攻め込んでくるだろうと誤解されていたため、1591年に4回にわたって使臣を派遣し、日本との連合説に対する釈明と、日本の動態に対する報告を行った。要するに、1591年2月の使臣帰国以降における全ての追加情報の内容は、侵略を予告するものであった。それにも関わらず、朝廷では侵略に対する本格的な論議がなかったのである。 結局、日本の侵略可能性に対する総合的な判断は、宣祖と朝廷の大臣が行うのである。帰国報告以後も繰り返された侵略警告にも拘らず、朝廷ではそれをまともに受け入れなかった。朝廷の雰囲気は、金誠一の報告だけで事態が進展したり、問題が解決するような状況ではなかったのである。要するに、金誠一の帰国報告が問題なのではなく、朝廷全体の責任なのである。ところが、戦争が勃発すると、宣祖だけではなく、朝廷の大臣全員の免責のための身代わりが必要となり、金誠一が選ばれたという訳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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