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조일관계와 대일사행의 파견
Late 16th Century Joseon-Japan Relations and Dispatch of Envoys to Japan
2
조회
0
다운로드
3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본 연구에서는 16세기 후반에 있었던, 통신사라고 불리는 두 차례의 대일사행[1590년, 1596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두 번의 통신사행은 임진왜란이라는 동아시아 국제 전쟁의 전야 내지는 와중에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통신사=‘평화의 사절’이라는 통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외교사행이었다. 1592년 일본의 사행 파견 요청에 대해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으로 이해했지만, 일본 측은 入貢使節 내지 服屬使節로 이해하면서 결국 파행적인 결과를 낳았다. 1596년의 사절은 왜란이라는 전란 속에서 애초부터 ‘신의’가 고려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최고 실권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지도 못했고, 사행 목적인 국서 전달도 못한 채 귀국해야 했던 사행이었다. 즉, 두 차례의 대일 사행은 조선의 자발적인 의지가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명칭은 통신사이지만, 내용은 통신사일 수 없는 사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통신사란 이름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국익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 차례의 통신사가 비록 일본에서는 통신사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조선왕조의 통신사 외교의 구상을 보여준 사행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two envoys sent to Japan (1590, 1596) called Tongshinsa in the late 16th century. The two Tongshinsa envoys were diplomatic envoys that did not associate at all with the conventional wisdom that Tongshinsa = ‘peace envoys’ as they were dispatched right before and during an international war in East Asia that was triggered with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Joseon understood Japan’s request for dispatching a diplomatic envoy in 1592 as a dispatch of Tongshinsa, but Japan’s understanding of it was an envoy to bring tribute or an envoy bringing news of surrender, which led to crippling results. The envoy of 1596 could not consider ‘faith’ from the beginning as it was during war due to the Japanese invasion. Furthermore, this envoy failed to meet with the greatest authority of the time, Toyotomi Hideyoshi, and it returned without completing its mission of delivering the king’s letter. The two envoys to Japan were completely different from that of the past in terms of the voluntary will of Joseon. From this perspective, while its name is Tongshinsa, these envoys could not be deemed as true Tongshinsa. Despite this, it can be said that Joseon dispatched envoys to Japan under the name of Tongshinsa as the best stance to take for the national interest. Though the two Tongshinsa did not receive treatment as Tongshinsa in Japan, it is meaningful in that they were envoys that exhibited the diplomatic plans of the Joseon Dyansty’s Tongshinsa.
참고문헌 (28)
- "宣祖實錄", 한국고전번역원, ~
- "宣祖修正實錄", 한국고전번역원, ~
- 김성일, "鶴峯集", 한국고전번역원, ~
- 김성일, "海槎錄", 한국고전번역원, ~
- 황신, "日本往還日記", 한국고전번역원, ~
- 박홍장, "東槎錄", ~
- 이맹휴, "春官志", ~
- 이민웅, "豊臣秀吉 朝鮮侵略" (2008), 경인문화사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박사, 한국사학과, pp.2014
- 김경태, "허세와 타협,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 (2019), 동북아역사재단
- 민덕기, "前近代 동아시아 세계의 韓・日관계" (2007), 경인문화사
- 三宅英利, "근세 한일관계사 연구" (1990), 이론과 실천
- 손승철, "朝鮮時代 韓日關係史硏究" (1994), 지성의 샘
-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2010), 경인문화사
- 한일관계사학회, "1590년 통신사행과 귀국보고 재조명" (2013), 경인문화사
- 한일문화교류기금, "근세 한일관계의 실상과 허상" (2020), 경인문화사
- 김대길, "조선시대의 정치와 제도" (2003), 집문당
- 김돈, "선조대 경인통신사의 사행과 조정의 대응방식", 역사교육, (144), pp.253~281 (2017), 역사교육연구회[DOI]
- 김문자, "島井宗室과 1590년 通信使 派遣問題에 대하여", 상명사학, 2 (1994), 상명사학회
- 김문자, "임진왜란기 일·명 강화교섭의 파탄에 관한 一考察: 사명당(松雲大師)·加藤淸正 간의 회담을 중심으로", 한국학, 28(3), pp.225~254 (2005),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문자, "豊臣秀吉의 冊封問題와 壬亂期의 講和交涉 : 정유재란의 원인을 중심으로", 중앙사론, (36), pp.253~288 (2012), 중앙사학연구소
- 김문자, "임진왜란기의 강화교섭과 加藤淸正 -조선왕자의 送還문제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42), pp.383~416 (2012), 한일관계사학회
- 민덕기, "임진왜란기 대마도의 조선 교섭", 동북아역사논총, (41), pp.97~135 (2013), 동북아역사재단
- 윤유숙,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발발전 한일교섭 실태", 일본학보, 0(70), pp.347~362 (2007), 한국일본학회
- 장순순, "조선전기 통신사의 개념과 성격", 전북사학, (37), pp.39~75 (2010), 전북사학회
- 장순순, "조선전기 통신사행과 對日外交의 특징", 한일관계사연구, (56), pp.55~94 (2017), 한일관계사학회
- 한명기, "임진왜란 직전 동아시아 정세", 한일관계사연구, (43), pp.175~214 (2012), 한일관계사학회
- 한명기, "임진왜란기 明·日의 협상에 관한 연구~명의 강화집착과 조선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98 (2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