移葬 과정을 통해 본 「顯隆園誌」의 성격
On the Hyeonryungwon Epit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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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1762년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이른바 임오화변은 조선시대 정치사에 가장뜨거운 논란을 불러온 사건이다. 이것을 잘 알면 조선 정치의 역학을 잘 읽을 수 있는데, 중요한 사건인 만큼 이견이 적지 않다. 이견을 대표하는 자료로 『한중록』과 「현륭원지」를 들 수 있는데, 두 문헌은 임오화변의 해석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의 사인을 사도세자의 광기와 영조를 향한 도발로 인한 처벌로 본 반면, 「현륭원지」는 모호한 서술 속에 품성과 자질이 우수한 사도세자가 역신들의 모함을 받아 죽은 것으로 이해하게 했다. 「현륭원지」는 임오화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시각을 지닌 핵심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료 성격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되지 않았다. 「현륭원지」는 장례 때무덤에 넣은 묘지문이니, 본고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1789년 사도세자 무덤의이장 과정 속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정조는 이장 중에 사도세자의 구묘에서 영조가써서 넣었던 묘지문이 발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것은 그냥 묻어버리게 하고, 새 무덤에는 자신이 직접 쓴 묘지문 곧 「현륭원지」를 묻었다. 조선 왕실의 이장 관례에 따르면 구 묘지문은 함부로 버릴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를 버리고 새 묘지문을 쓴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고는 그 이유를 구 묘지문 곧 「영조친제지문」과의 비교속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버려진 구 묘지문은 1968년 서울위생병원 간호학교 신축 공사 중에 사도세자의무덤 壙中에서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 이 묘지문은 영조가 그린 사도세자의 인물상을 명확히 보여주는데, 사도세자를 세상 어떤 사람보다 무도한 미치광이로 그리고 있다. 정조로서는 아버지를 미치광이 반역자로 그린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구 묘지문은 묻어버리고 자신이 새로운 전기를 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조가 새로 쓴 묘지문 「현륭원지」는 사도세자의 잘못은 감추면서 탁월한 성품과 자질만 기술했고 죽음은 모호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에 널리 퍼지지 않도록『열성지장』 등에 올리지 않게 했다. 이런 「현륭원지」의 사건 축소적 성격을 알아야 이자료는 물론 임오화변의 실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Imo-hwabyeon, the death of Prince Sado in 1762, was the hottest controversy in the political history of Joseon Dynasty. Memoirs of Lady Hyegyeong and Hyeonryungwon Epitaph are key source for the interpretation of the death. Memoirs of Lady Hyegyeong, the wife of Prince Sado, described him as a mad man and traitor, Hyeonryungwon Epitaph written by King Jeongjo, the son of Prince Sado, as a brilliant prince. Despite Hyeonryungwon Epitaph is the core source for understanding the death, there is no in-depth study on it. This article tried to understand Hyeonryungwon Epitaph from the transfer of the tomb of Princet Sado in 1789. During the funeral process, King Jeongjo received a report two pairs of old epitaphs were discovered, but they had been buried without any notice. According to the transfer funeral custom of the Joseon royal family, the old epitaphs should not be abandoned. The old Epitaphs written by former King Youngjo were miraculously discovered in 1968 during the construction of a new Nursing School at Seoul Medical Hospital. The Epitaphs show a clear portrait of Prince Sado as the most insane madman in the world. As a son, King Jeongjo could not leave his father’s portrait like that. So the previous Epitaphs should have been buried in the ground, and he wrote a new Epitaph for new biography of his father. The newly written Hyeonryungwon Epitaph was able to hide Prence Sado’s mistakes and describe only its outstanding character and qualities. In order to prevent the Epitaph spreading, the King prevented to take the Epitaph to be a part of Kings’ Epit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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