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고려의 崔致遠 만들기 - 「지증대사비」의 건립을 중심으로 -

1

조회

0

다운로드

6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최치원은 875년 당에서 귀국하였다. 신라왕의 명으로 4개의 비문인 四山碑銘을 찬술하였다. 그러나 이 비들은 신라 말 고려 초 혼란의 와중에서 제대로 건립되지 못하였다. 특히 「지증대사비」는 진성여왕 7년(893) 경에 찬술된 이후 30년이 지난 신라 경명왕 8년, 고려 태조 7년인 924년의 시점에서 친고려적 성향의 호족들이 간여하여 건립하였다. 이에 비문의 내용과 음기는 최치원의 찬술이 맞지만, 직함이 나오는 제액에 의도적인 가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치원이 찬술한 「지증대사비」에는 분명히 入朝賀正兼 迎奉皇花等使 朝請大夫 前守兵部侍郞 充瑞書院學士 賜紫金魚袋 臣 崔致遠이라고 그의 직함이 쓰여져 있다. 그런데 많은 논문에서 최치원의 직함이 다른 3비와는 달리 이 비에서 변화한 것에만 주목하였을 뿐,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지 않고, 이 직함을 이용하여 논지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비의 건립에는 아자개, 희필과 같은 고려계 인사들이 단월로서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였고, 고려의 寺主 능선의 주도 아래 건립된 사실을 중시하여, 제액에 쓰여진 그의 직함이 변개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 배경으로는 첫째로, 924년 6월에 「지증대사비」의 건립을 주도한 이들이 다음 달인 7월에 귀국하는 봉암사 도헌의 법손 긍양을 봉암사에 초치하려는 의도에서 간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둘째로 이 비에서 최치원의 직함이 변한 것은 중국 유학승 최치원도 고려에 밀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즉 고려로의 人心 歸服을 위해 당시인들의 연민을 받고 있던 최치원을 친고려적 성향의 인물로 만들고자 한 의도로서 「지증대사비」를 건립하면서 그의 직함을 조정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인물은 「지증대사비」가 소재한 봉암사의 원주와 「징효대사비」가 있던 흥녕사의 寺主로 있었던 능선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보았다.

Abstract

Choi Chiwon was returned to Silla from Dang in 875. After being returned, he wrote four kinds of monumental inscriptions according to the order by the king of Silla. But the inscriptions could not be established as tombstones in the transformation period from Silla to Koryo. Among the four monumental inscriptions, the “Jijeungdaesabi” was established as a tombstone in 924 (the 8th year of Kyungmyung, king of Silla, and the 7th year of the first king of Koryo) after 30 years from the time when the inscription was written in 893 (the 7th year of Queen of Jinsung in Silla). It is true that the inscription of the Jijeungdaesabi was written by Choi Chiwon. However, the official title of Choi Chiwon in the first part of the tombstone was changed. The title of Choi Chiwon was written as 入朝賀正兼 迎奉皇花等使 朝請大夫 前守兵部侍郞 充瑞書院學士 賜紫金魚袋 臣 崔致遠 in the Jijeungdaesabi. Regarding the tile, most existing studies simply indicate that this title is different from that of other tombstones. without explaining the reason why the tile is different. I found the fact that this tombstone was established by the direction of Neungsun, a representative of Buddhists in Koryo, with financial support from Ajagae and Hipil. And I supposed that the title was intentionally changed by the establishers of the tombstone. I explained that the Jijeungdaesabi was established in June 924 in order to invite Geungayang (Buddhist priest)returning from Dang in July 924. And the tile of Choi Chiwon was changed because the establishers of the tombstone wanted to inform that he, who studied in China, secretly helped the establishment of Kingdom of Koryo. In other words, the establishers of the Jijeungdaesabi changed the title of Choi Chiwon for the people's loyalty toward Koryo, by making Choi Chiwon, who was respected by the people at that time, as a person supporting Koryo. Thus, I concluded that the person who led to change the tile of Choi Chiwon, was Neungsun, who was the representative of the two Buddhist temples, Bongamsa where the Jinghyodaesabe was located and Heungnyungsa.

참고문헌 (37)

  1. 김복순, "최치원과 최승로", 경주사학, 11 (1992)
  2. 김복순, "신라의 유학자",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5 (2004)
  3. 김복순, "삼국유사에 보이는 유교사관, In (월운스님화갑기념논총)대장경의 세계" (1999)
  4. "삼국사기", ~
  5. "고려사", ~
  6. "신증동국여지승람", ~
  7. 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1986), 아세아문화사
  8. 김윤곤, "고려 현종 대의 문묘종사에 대하여 -최치원의 경우를 중심으로-, In 고려사의 제문제", pp.523~ (1986), 삼영사
  9. 남동신, "나말여초 전환기의 지식인 최치원", 한국고대사강좌, 8, pp.320~ (2002)
  10. 전기웅, "나말여초 지방출신 문사층과 그 역할", 부산사학, 18, pp.19~ (1990)
  11. 김복순, "최치원의 법장화상전 검토", 한국사연구, 57 (1987)
  12. 김복순, "최치원의 해외체험과 문화수용", 한국문화연구, 10 (2006)
  13. 이기백, "통일신라기 및 고려 초기의 유교적 정치이념", 대동문화연구, (6․7합) (1970)
  14. 김시습, "매월당집 권11", ~
  15. 황선영, "금석문에 보이는 신라 하대의 문산계", 부산사학, 29 (1995)
  16. 이현숙, "신라말 어대제의 성립과 운용", 사학연구, 43․44합 (1992)
  17. "계원필경집"
  18. 박용운, "고려시대의 문산계", 진단학보, 52 (1981)
  19. 최종석, "고려초기의 관계(官階) 수여양상과 광종대 문산계(文散階) 도입의 배경", 역사와 현실, (67), pp.131~169 (2008), 한국역사연구회
  20. 김갑동, "고려 초기 관계의 성립과 그 의의", 역사학보, 117, pp.6~10
  21. "신라 말기 최치원의 관계와 관직에 대하여", 한국중세사연구, 9, pp.26~ (2000)
  22. 하일식, "통일신라기의 나당 교류와 당 관제의 수용", 강좌 한국고대사, 4, pp.179~207 (2002)
  23. 남동신, "나말여초 전환기의 지식인 최치원", 강좌 한국고대사, 8 (2002)
  24. 조범환, "崔致遠의 在唐 活動과 歸國 - 특히 仕宦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 (33), pp.59~78 (2006), 이화사학연구소
  25. 최영성, "최치원 시무책의 건의배경에 대한 고찰", 한국사상과 문화, 5, pp.85~ (1999)
  26. 이문기, "崔致遠 撰 9세기 후반 佛國寺 關聯資料의 檢討", 신라문화, (26), pp.209~257 (2005), 신라문화연구소
  27.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1993), 일조각
  28. 이현숙, "나말려초 최언위의 정치적 활동과 위상", 이화사학연구, 22, pp.15~ (1995)
  29. 김철준, "문인계층과 지방호족, In 한국사 3", pp.612~ (1981), 국사편찬위원회
  30. 장일규, "신라말 경주최씨 유학자와 그 활동", 사학연구, 45, pp.36~37 (1992)
  31. 최영성, "역주 최치원전집 2", pp.44~47, 1999
  32. 이현숙, "나말여초 최치원과 최언위, In 퇴계학과 한국문화", pp.199~
  33. 전기웅, "고려 초기 신라계 세력과 그 동향", 부대사학, 17, pp.149~ (1993)
  34. 윤경진, "나말여초 성주(城主)의 존재양태와 고려의 대성주정책", 역사와 현실, 40, pp.121~122 (2001)
  35. 한기문, "고려태조의 불교정책", 대구사학, 22 (1983)
  36. 한기문, "고려사원의 구조와 기능", pp.22~32 (1998), 민족사
  37. 李仁在, "선사(禪師) 긍양(兢讓;878~956)의 생애와 대장경(大藏經)", 한국사연구, (131), pp.165~190 (2005), 한국사연구회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13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