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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州鄕校의 移建과 重修

Transfer and Renovation of Gwangju Hyangg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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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고려시대에 향교가 설립되기 시작했다고 보았을 때, 현재 하남에 있는 廣州鄕校도 고려시대 어느 시점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조선 태종 18년(1418)에 前 廣州敎授官 皮子休 등이 왕에게 站夫의 수를 더 정하자고 진언한 내용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廣州敎授官은 향교에 파견된 교관이므로 1418년 이전에 광주향교가 설립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의 광주향교 위치는 처음 설립한 위치가 아니라 옮겨온 장소이다. 그런데 옮겨온 시기나 이유, 그 위치에 대해서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즉 광주향교 移建의 시기는 『重訂南漢志』에서 숙종 29년(1703)으로 기록된 이래 지금까지 모든 자료가 이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移建의 이유나 원 위치에 대해서도 문헌의 고증이 없었다. 그러나 광주향교가 이건한 연대는 『중정남한지』 기록대로 숙종 29년(1703)이 아니라, 경종 3년(1723)일 가능성이 높다. 홍경모는 『중정남한지』에서 숙종 癸未年이 이전한 연대라 기록하고 있으나, 『학교등록』을 검토해보면 경종 癸卯年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홍경모가 다른 자료를 보고 인용할 때 계묘년을 계미년으로 잘못 서술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향교가 고읍터로 옮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원래의 향교가 건물이 헐고 무너질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터만 남아있던 고읍터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단의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청은부원군 沈浩의 묘 문제가 제기되는데, 심호의 묘가 원래 향교의 부근에 자리한 것은 사실이고, 또 그가 사망한지 약 20년 후에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지금의 양평으로 이전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전해오는 말대로 향교를 옮기는데 직접 관여했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광주향교의 중수에 대해서는 연산군 8년(1502) 지은 『허백당문집』의 「청풍루기」, 선조 35년(1602) 경에 작성된 오산 차천로의 「광주향교중창모재문」, 효종 10년(1659) 첨지중추부사 심광수가 올린 상소문, 정조 12년(1788) 「광주부교궁중수기」, 철종 10년(1859) 「광주부향교명륜당중수기」 등과 광무 7년(1903) 광주부윤 서리 양주군수 홍태윤이 중앙에 보낸 공문, 1956년의 「광주향교중수기 부명」 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을 통해서 향교 건물이 꾸준히 중수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 기록들을 통해서 향교를 이건한 당시인 경종 3년(1724) 경에는 紅箭門이 있었고, 최근에 복원된 동재는 헌종 12년(1846) 이전에는 존재했으며, 1956년 이전까지는 익랑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향교 제사에 쓰이는 제향비용에 대해서 전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18세기 초의 경우, 특정 지역, 특정 가구의 民結 所納米로 사용되기도 하고, 19세기 말에는 향교 은행나무에서 열리는 은행으로 석채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송파장이나 사평장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장세가 향교의 비용으로 충당된 것도 알 수 있다. 광주향교는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서울시의 강동, 송파, 강남 그리고 경기도의 광주, 성남, 하남의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향교였다. 광주관아가 인조 4년(1626)년 병자호란에 대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옮겨간 뒤에도 광주향교는 여전히 하남에 남았다. 광주향교는 창건된 이래 기록상 고읍 터로 한 차례 옮겨지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오랜 기간 하남에 남아 존속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광주향교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접근이 거의 없었고, 연구도 진행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광주향교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원 위치와 이건, 이건의 사유, 수차례의 중수 등을 먼저 살펴보고자 하였다. 물론 이후에도 여전히 밝혀야 될 많은 과제가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나, 그 부분은 향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Abstract

Although it is not known when Gwangju Hyaonggyo(country school) was established, scholars speculate that it was built in the Goryeo period, or more precisely, before 1418, as a historical record shows that Pijahyu, a former Gwangjugyosugwan(廣州敎授官), suggested the King that the number of the school staff should be increased in 1418(18th year of King Taejong). Gwangju Hyanggyo was transferred to a different place after it was founded, but the exact date of when the country school moved to where is controversial. For instance, according to a treatise entitled Jungjeongnamhanji, the school moved to a different location in 1703(29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while a document entitled Hakgyodeungnok says it was not until 1723 that the school was established in a different location. Hakgyodeungnok also records that the school moved to the site of an old public office because the school building was worn out and about to be dismantled. However, rumor has it that Sim Ho, the father of Queen Sim, had the school moved to a different place in order to raise his tomb on that site. Although we do not know if Sim Ho was really involved in the transfer of the school, it holds true that Sim’s graveyard was near the school. Also, the school filed a complaint with the government several times regarding the matter of transferring Sim’s tomb in around 1724. Gwangju Hyanggyo covered its expenses for the maintenance of the school and the performance of the Seokjeon ritual, which was held in spring and fall every year, by asking the local government to provide it with Wonrim and Gwandunjeon and allow it to possess the lot where the school stood before it moved to a new location. It also levied land taxes on Deukgyeong, Sullye, and Jatgeum, who lived in Dunji-dong, and taxes on salt shops and malted wheat wholesalers in the nearby markets including Songpajang and Sapyeongjang. Various documents including letters of appeal by government officials and records on the remodeling of the school building, which kept in the Gwangju Hyanggyo testify that the school had been renovated on a regular basis. Those records make scholars speculate that there was a gate called Hongjeonmun at the school when it was moved to a new site in around 1724 and Dongje, which was recently restored, and Iknang survived until 1724 and 1956, respectively.

참고문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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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高麗史節要", ~
  3. "增補文獻備考", ~
  4. "朝鮮王朝實錄", ~
  5. "重訂南漢志", ~
  6. "廣州府邑誌", ~
  7. "學校謄錄", ~
  8. "虛白堂文集", ~
  9. "五山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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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備邊司謄錄", ~
  12. "原州鄕校誌", ~
  13. "靑恩府院君 墓碑文", ~
  14. "廣州全圖", ~
  15. 朝鮮古蹟調査報告, "朝鮮總督府", ~ (1916)
  16. 李永閔, "廣州의 舊邑治 ‘고골’에 관한 歷史地理的 硏究", 地理學, 26(1) (1991)
  17. 廣州鄕校 實測調査報告書, "京畿道",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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