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혼인 습속의 계층성(階層性)과 그 배경
Marital Stratification and Its Background in Gogu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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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구려에서 확인되는 두 가지 혼인 습속인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 과 서옥혼(壻屋婚)을 별개로 작동했던 혼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함을 논증하고,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을 계층성의 측면에서 찾고자 하였다. 형사취수혼은 북아시아 유목민족에게서 발견되는 혼인 습속으로, 일반적으로 이러한 혼인 습속은 고구려의 선호혼(選好婚)이었다는 것이 통설적 견해로서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형사취수혼의 실례는 고국천왕의 왕후였던우씨(于氏)와 후에 산상왕으로 즉위하는 연우(延優)의 결합이 유일하다. 고구려왕실에서 취수혼이 나타난 이유는, 이것이 당대의 선호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계루부(桂婁部)와 연나부(椽那部)의 인척관계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이 우선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지』와 『후한서』에서는 서옥혼이라는 혼인 습속을 확인할 수 있다. 서옥 곁에 쌓아둔다는 ‘방돈전백(傍頓錢帛)’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신랑 측이신부 측에 지불한 혼납금(婚納金)으로 보아야 하며, 이를 부가(夫家)의 재산 망실을 방지하는 취수혼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견해가 기존의 통설을 이루고 있었48 | 동북아역사논총 60호다. 그러나 사위가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처가(妻家)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봉사혼(奉仕婚, 勞役婚)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는 신부 측에서 신랑 측에 지불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방돈전백’이 신랑 측이 지불한 것이 아니라면 본인이 사망하더라도 신랑 측에서는 재산상의 망실이 없으므로 굳이 취수혼(娶嫂 婚)을 선호할 이유가 없다. 서옥혼과 취수혼을 연결해주는 매개였던 ‘방돈전백’ 이 신부 측이 신랑 측에 봉사의 대가로 지불한 것이라면, 이는 서옥혼과 취수혼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여준다. 결국 형사취수혼과 서옥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별개의 혼인 습속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차이는 혼인 주체의 계층 차이로 설명될 수 있다.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물질문화로 뒷받침되는 고구려 지배집단의 부여 출자는 왜 북아시아 유목민족의 취수혼 풍습이 고구려 왕실에서 재현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부여계 출신 중 고구려의 정치 구조에서 상부를 차지하는 집단이 생기면서 자연스레 취수혼 습속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고, 이에 국인들도 이를 자연스럽게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민들의 주된혼속은 서옥혼이었으며, 따라서 중국 측 사서에는 서옥혼이 고구려의 혼인 습속으로 특기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고구려의 혼인 습속이었던 서옥혼과 형사취수혼은양자가 다른 방식으로 각기 작동한 별개의 혼인 제도인 것이며, 양자의 성격과존속 기간에 큰 차이가 있었던 주요 배경은 혼인 습속을 시행했던 당사자들의계층성의 차이에 있다고 하겠다.
Abstract
This thesis examines two marital patterns in Goguryeo and argues that the social stratification was the main reason which caused such difference. The levirate is a marriage custom commonly found in nomadic people in Northern Asia. It is a conventional view that the levirate was the most preferred marriage custom in Goguryeo. However, there is only one verifiable record of the levirate in Goguryeo; the marriage between queen Wu of King Gogukchen and Yeon-u who later became a king Sansang. The principal reason why the levirate took place in the royal family of Goguryeo is not because it was the preferred marriage custom of the time. Rather, it is more plausible to understand the case of queen Wu and Yeon-u as the result of the political coalition between Keru tribe (桂婁部) and Yeonna tribe (椽那部). Meanwhile, the marriage custom called son-in-law chamber 50 | 동북아역사논총 60호marriage (壻屋婚) can be identified in Chinese historical records. It was a kind of marriage custom of the son-in-laws’ habit of taking residences at their brides’ houses. The ‘傍頓錢帛(the funds and silk were placed next to the bride’s house)’ was regarded as the price paid by the groom and commonly regarded as a safety valve to prevent the loss of property of bride’s house. However, since the son-in-law stayed at the bride’s house until their child reached adulthood, such kind of the marriage was most likely a labor service marriage. Thus, son-in-law chamber marriage and the levirate may be separate marriage customs operating in different ways, and such different customs may have been derived from the social stratification of Goguryeo society. The origin of Goguryeo ruling groups from Buyeo, supported by historical records and archaeological material cultures, explains why the levirate was performed Goguryeo royal court. Since the ruling class of the Goguryeo’s political structure was dominated by a group of people from Buyeo, the ruling groups of Goguryeo naturally had an appreciation for the concept of the levirate. However, the majority of Goguryeo people were preferring the son-in-law chamber marriage. As a result, the Chinese records are only indicating the son-in-law marriage as the marriage custom practiced in Goguryeo. In conclusion, son-in-law chamber marriage and the levirate were separate marriage customs that functioned in different ways. Although both were practiced in Goguryeo, there were major difference in the character and the duration of practice between two due to the social stratification of Goguryeo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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