志山 金福漢의 파리장서운동과 그 사상적 배경 — 華西學派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
Kim Bok-han’s Petition Movement to Paris Peace Conference and Its Idealogical Back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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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월에 郭鍾錫 등 유림 137명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청한 독립청원운동이다. 金福漢은 호서본 작성의 모든 과정을 주도하였다. 여러 판본들을 비교해 보면 호서본은 영남본에 비해 좀더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호서유림들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서본의 보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파리장서운동을 기획⋅실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김복한의 능동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본고에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능동적인 입장에서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규명하는 일이다. 특히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유학사상사의 전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김복한의 역사적 위상이 드러나도록 시도하였다. 김복한이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할 때 유림계의 보수세력으로부터 오랑캐와 同事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김복한의 대국적 태도는 남당학파와 경쟁관계에 있던 화서학파에 대해서, 특히 1903년 ‘최익현 문제’가 야기된 이후에도 김복한이 최익현에게 보여준 포용적 태도에서부터 두드러져 보였다. 이것이 파리장서운동을 추진할 때의 대승적 태도로 연결되었다. 이는 ‘事功’을 중시한 김복한의 역사의식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Abstract
The petition movement to Paris peace conference was the movement for 137 Neo-Confucian scholars including Kwak Jong-seok to ask for Korean independence in March, 1919. Kim Bok-han had led all the course of Ho-seo version. Although we don’t know the exact contents on the both of Yeong-nam and Ho-seo versions, but Ho-seo version might be more conservative than Yeong-nam version in comparison with other versions. This was because Ho-seo version basically represented the conservative stance of the Neo-Confucian scholars in Ho-seo (Southern Chung-cheong province). However although Ho-seo version had conservative characteristic, the projecting and practicing of petition movement to Paris peace conference shows Kim Bok-han’s active attitude. What I would like to explain in this paper is the background of how spontaneously Kim led the movement. Especially I tried to make Kim’s historical status be revealed through talking the idealogical history of Neo-Confucianism ignored until now. Although Kim received blames he behaved with barbarians when he led the petition movement from the conservatives, Kim never submitted on those blames. Kim’s tolerant attitude was prominent in relation with Hwa-seo school against which Nam-dang school(Kim’s party) was a rival, especially from also after ‘the problem of Choe Ik-hyeon’ in 1903. This attitude was connected to the petition movement in tolerant manner. The tolerant attitude like this was revealed from Kim’s historical consciousness attached importance to ‘the completion of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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