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의 사상과 교육관 — 해창집과 유교유신론을 중심으로 —
Thought and Educational Viewpoints of Haechang海窓 Song Ki-Sik宋基植 - Focused on The Collection of Haechang 海窓集 and Innovative Ideas on Confucianism 儒敎維新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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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송기식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의병활동과 교육활동을 통해 국권피탈기 당시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이자 기존 유교의 폐단을 개혁하고 다양한 서양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인 유교개혁론자이다. 그는 처음 우리나라가 쇄국 정책을 펼쳤을 때 위정척사파로 활동하였다가 개국 이후에는 유교를 바탕으로 서양 사상과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온건개화파로 전향하였다. 청년기 때 위정척사로 활동한 것은 당시 외국 문물이 좋지 않게 밀려오던 상황과 조부(祖父) 정구현(鄭九鉉) 및 그의 스승 김도화(金道和), 김흥락(金興洛), 이만도(李晩燾)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후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영향을 받아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바라보았기보다는 유학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였으며, 심지어 과학 분야에까지 유학의 사상을 접목시켰다. 이러한 유학에 입각한 관점은 그의 교육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1909년 이상룡의 분부에 따라 봉양서숙을 지어 교육을 시작할 때부터 일본으로부터 해방 될 때까지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교육활동에서 어떤 학문보다 유학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유학이 동서고금의 종교⋅철학⋅과학의 사상을 모두 포괄하여 세계의 종교를 통일할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념을 바탕으로 도덕성 함양을 근본으로 삼고 학문적 지식을 지엽으로 보았으며, 도덕성 함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식만을 쌓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과학과 같은 학문적 교육보다 종교 교육을 우선시한 것이다. 나아가 그의 교육철학은 관념적인 단계에 머물지 않았다. 현재의 교육 제도를 비판하며 교육의 대중화를 위해 경전들을 국문으로 번역하고,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또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별과 지위와 무관하게 대중을 계몽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를 위하여 한문 경전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 유학 교육을 우선시하면서도 서양 학문과 사상의 장점을 인정하며 배우기를 권장하였다. 그는 일평생 교육 사업에 전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교육에 관한 실질적인 성과를 크게 남기지는 못했다. 이는 기존 사회 질서에 입각한 사고를 유지하던 유학자들에게는 그의 유교개혁론과 평등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그의 사상과 교육관은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오히려 그가 당대 지식인들보다도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Abstract
Born in Andong, Kyŏngsangbuk-do Province, Song Ki-Sik 宋基植 is both an independence activist who resisted against Japan in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a Confucian reformist who corrected the evils of Confucianism and accepted various Western studies and ideas. He protected the orthodox and repelled the heterodox 衛正斥邪 under the influence of Chŏng Ku-hyŏn 鄭九鉉, and Kim To-hwa 金道和, Kim Hŭng-rak 金興洛, and Yi Man-do 李晩燾 who were his mentors when Korea implemented isolation policies, but after Japan-Korea Treaty of 1876, he was converted into moderate reformists positively accepting Western ideas and civilizations, predicated on Confucianism under the influence of Sŏkju 石洲 Yi Sang-ryong 李相龍 since he did realize the limitations of reality. However, rather than comprehending Western culture and ideas from completely new perspectives, he interpreted them based on Confucianism, and even applied the ideas of Confucianism to the scientific field. These perspectives also had effects on his educational activities. In 1909, under Yi Sang-ryong's orders, he built Bongyang Sŏsuk 鳳陽書塾 and devoted himself to educational activities. In his educational activities, he placed more importance on studying Confucianism because he believed that Confucianism had the principle to unify the world's religions by encompassing all religions, philosophies, and scientific ideas. In other words, he prioritized religious education over academic education such as science. Furthermore, his philosophy of education did not stop in the ideological stage. Criticizing the current education system, he translated the scriptures into Korean for the popularization of education, and argued that not only men but women have the right to receive education. In addition, while prioritizing Confucianism, he encouraged the public to learn Western studies and ideas. Although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Song Ki-Sik devoted his entire life to educational work, he did not achieve many practical results in education. This seems to be due to the fact that it was not easy for those who clung to the existing social order to accept his Confucian reform and equality theories. As such, his ideas and views of education were not accepted by people at the time, but it is undeniable that he had more progressive ideas than any other intellectual of the time d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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