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송시열 초상〉의 이상화 양상
Text and Image: Two Methods of Idealizing Song Siyeol in National Treasure No.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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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239호 〈송시열 초상〉은 문제적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제작 시기에 대한 편년이 연구자마다 달라 17세기 중반이나 후반으로 보기도 하고 18세기 초반이나 후반으로 보기도 하는 등 편차가 커 혼란이심한 편이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 1607-1689) 45세 때인 1651년에 화양서옥(華陽書屋)에서 썼다고 하는 화면 오른쪽 상단의 화상자경(畵像自警) 관서(款書) 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1778년 3월에 송시열의 영정에 치제하며 썼다는 화면 상부의 어제(御製) 절구(絶句)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내용을 가탁하여 써넣은 것이다. 왜냐하면 화양서옥은 송시열이 60세 때인 1666년에 세워져 1651년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가 화상자경을 쓴 것은 77세 때인 1683년에 한시각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가 1778년 3월에 썼다는 어제 절구는 본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1707년 7월에 정몽주(鄭夢 周, 1337-1392)의 영정에 치제할 때 쓴 것이나 훗날 송시열 추숭 사업을 가장 많이 벌인 정조의 어제로 와전되어 이와 같이 써 넣은 것이다. 가탁의 시점으로 설정된 1778년은 정조가 송시열을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의 묘정에 배향한 해이고, 3월은 명 의종(毅宗, 재위 1628-1644)의 기일인 3월 19일에 만동묘에 제향할때 부근의 화양서옥이나 화양서원에 봉안된 송시열의 영정에도 같이 제향했던 의미 있고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선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이 국보 〈송시열 초상〉은 가장 이른 시기의 사실적 모습을 전해 주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의 송시열 초상과 비교할 때 용모가 많이 다르며 이상적인 귀인의 상으로 고쳐 그려진 것이다. 또한 심의와 복건의 도상이나 화법도 17세기의 평면적이고 고졸한 조형에서부터 18세기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조형은 물론 19세기 초의 다소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의고적 조형까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적 현상과 특수한 요소들은 근본적으로 18세기 중·후반 이후 송시열에 대한 추모와 숭배 의식이 고조되며 송시열의 초상을 의도적으로 이상화시켜 이모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상화 현상은 문자와 이미지의 양면에 걸쳐 전면적으로 구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깊이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국보 〈송시열 초상〉의 가장 고유하고 핵심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Abstract
This essay discusses how the Portrait of Song Siyeol, now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Seoul (henceforth referred to as National Treasure No. 239), idealized Song Siyeol (1607-1689) through two methods: text and image. Two texts written on the painting, Song’s own inscription and a poem by King Jeongjo (r. 1776–1800), were borrowed from other paintings to legitimate National Treasure No. 239 and eventually Song himself, the subject of the painting. According to the painting’s accompanying text, Song’s inscription, a hwasang jagyeong (self-admonishing portrait inscription), was composed by Song himself at the Hwayang Pavilion in 1651. The Hwayang Pavilion, however, did not exist in 1651; Song’s hwasang jagyeong was therefore most likely written much later, in 1683 when Song had an opportunity to view another portrait of his by the renowned court painter Han Sigak (1620–after 1690). Moreover, the poem attributed to King Jeongjo was originally penned by King Sukjong (r. 1674–1720) as an inscription for a portrait of Jeong Mongju (1338–1392). The painting disguised this poem as written by Jeongjo in 1778 when he enshrined Song Siyeol into the king Hyojong’s (r. 1619–1659) room in Jongmyo (Royal Confucian Shrine). The decision to incorporate these texts reflects the high esteem that Song was accorded during the reign of Jeongjo and represents one method of idealization at work in the painting. The image of Song depicted in National Treasure No. 239 also aims to idealize Song Siyeol through the use of specifically codified imagery. The physiognomy found in this painting, depicting Song as an ideal nobleman, is entirely different from the more realistic portrayal of Song that is found in his earliest portraits, which date from the late seventeenth to the early eighteenth centuries. The iconography of, and drawing techniques for, Song’s sim’ui bokgeon (formal Confucian dresses) also adopt abstract and conceptual styles that do not belong to any period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National Treasure No. 239’s idealization of Song through the synthesis of diverse iconographies and drawing techniques taken from several periods has resulted in the coexistence of heterogeneous styles within a single painting: from the flat and unadorned style of the seventeenth century, to the realistic and graphic style of the eighteenth century, to even the ideological and archaistic style of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The deployment of these dual methods of idealization in National Treasure No. 239 is the result of a sharp rise in enthusiasm toward commemorating and venerating Song Siyeol after the mid-to-late eighteenth century. Consequently, painters of the late Joseon dynasty began deliberately idealizing him in their works. National Treasure No. 239 is a noteworthy example of just such an act of idealization, one realized via the dual methods of text and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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