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71세 초상〉: 강세황(姜世晃), 이명기(李命基),정조(正祖)가 합작한 초상
Portrait of Kang Sehwang at Age 71: A Collaboration between Kang Sehwang, Yi Myeonggi, and King Jeo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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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강세황(1713-1791)은 <70세 자화상>에서 관모와 야복을 병치한 유례없는 도상(圖像)으로 오랜 야인(野人) 생활과 만년의 출사(出仕)로 집약되는 자신의 삶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정작 강세황은 <70세 자화상>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1783년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화원(畫員)인 이명기(李命基, 1756-1802 이후)로 하여금 강세황에게 <71세 초상>을 그려주도록 명하였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야인의 자존(自尊)을 수차례의 자화상 제작으로 승화시킨 바 있는 강세황은 전통적인 ‘관복본’ 초상의 형식을 따른 <71세 초상>을 받고 나서야 자신의 초상이 완성되었다고 여겼다. 관료로서의 공적(公的) 이미지가 투영된 <71세 초상>은 강세황뿐만 아니라 진주(晉州) 강씨(姜氏) 가문의 정치적 복권을 상징하는 기념물로서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71세 초상>에서 강세황은 오른손을 옷 밖으로 내밀고 있는데, 유독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 중에는 당시로서는 예외적인 도상이었던 ‘손’을 그린 것이 많아 주목된다. 이명기는 초상화별로 다양한 손동작을 그렸으며 모두 명암법을 사용해 세밀하게 묘사했다. 특히 이명기가 ‘구법(舊法)’과 ‘신법(新法)’에 따라 두 본으로 모사한 <윤증(尹拯) 초상>을 보면 그가 손을 새로운 회화 기법을 적용하는 데 관건이 되는 대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명기가 손을 통해 보여 준 조형적, 기법적 시도는 초상화가로서의 작가적 의식 증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국수(國手)’로 불린 이명기의 초상화가로서의 독보적 위상과 강한 자의식을 반영하듯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초상화가 여러 점이 전한다. 18세기에 이르러 작가가 명시된 초상화가 늘어나고 아울러 그중에 비관습적 조형성을 띤 작품이 많은 것을 고려해 보아도 손 노출 도상은 이명기의 작가적 시도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71세 초상> 위에는 정조가 강세황 사후에 내려 준 제문(祭文)이 적혀 있다. 이처럼 정조는 이명기에게 당대 관료의 초상화 제작을 맡기고 자신은 대상 인물과 관련된 글을 지어 주는 방식으로 초상화 주인공과의 군신 관계를 확인, 공표하였다. 정조는 역사 속 사대부의 초상화를 모사하고 감상하는 데에도 직접 관여했다. 정조가 이명기에게 허목(許穆, 1595-1682)의 초상화를 모사하여 진상하도록 한 것은 남인(南人)을 배려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조는 허목의 정적(政敵)이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초상화 위에도 찬문을 남겼다. 송시열은 주희(朱熹, 1130-1200)에 대한 숭상의 뜻으로 심의(深衣)를 입은 모습으로 초상화에 그려졌다. 송시열을 따랐던 정조대의 노론(老論)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심의본 초상이 유행하였다. 정조가 초상화를 이용하여 송시열에 대한 존숭을 표시한 것은 노론계의 성리학적 도통(道統)을 인정하고 나아가 자신을 유교 군주로서 이상화하기 위함이었다. 요컨대 정조대에 관복본과 심의본이 사대부 초상화의 양대 축을 이룬 것은 소론(少論) 및 남인 등에게는 정치권력을, 노론에게는 주자 성리학의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정조의 탕평책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Abstract
The self-portrait of 1782 depicts Kang Sehwang (1713–1790) at the age of 70, dressed in an official black hat and a plain robe, a rather unconventional clothing combination, signifying both Kang’s entrance into government office late in life and the long years he passed in reclusion. When Kang joined the giroso (Office of the Elders) in 1783, King Jeongjo (r. 1776–1800) ordered the leading portraitist of the period Yi Myeonggi (1756–after 1802) to paint Kang’s formal portrait in full official attire. Kang considered this portrait to be the ultimate expression of his painted likeness; here, his lifelong aspiration to have a proper self-image was fulfilled. This portrait came to be regarded as a symbol of the political reinstatement of Kang and his family and was handed down to posterity as such. The most intriguing feature in Portrait of Kang Sehwang at Age 71 is the right hand that Kang leaves exposed. With little exception, in literati portraiture, hands were hidden from view. Yi Myeonggi, however, painted several portraits of literati in which sitters expose their hands and paid special attention to naturalistic depictions of various hand gestures, using new techniques of shading. It seems that Yi recognized the accurate depiction of hands as a defining feature of the new technique of portrait painting. Yi’s stylistic and technical experiments reflect his preeminent status and confident command as a portraitist. In several cases, Yi even signed the portraits he painted, which was very rare for a court portraitist. The number of portraits that were signed by their maker increased over the eighteenth century. Many of these signed works exhibit unconventional stylistic traits. The trend toward individuality and experimentation which Yi Myeonggi exemplifies is an important development in eighteenth-century portraiture. Another important feature of Portrait of Kang Sehwang at Age 71 is the eulogistic inscription in the upper right by King Jeongjo. King Jeongjo often commissioned portraits of his high officials from Yi Myeonggi and composed eulogies for the sitters. Many portraits of literati of the time were closely related to King Jeongjo’s tangpyeong policy (policy of impartiality) which was intended to ensure that the appointment of officials was not influenced by factional affiliations. The king equally supported the leading Noron (Old Doctrine) faction, consisting of orthodox followers of Zhu Xi (1130–1200), and the politically marginalized Soron (Young Doctrine) and Namin (Southerners) factions. To further the aims of this policy, King Jeongjo also actively engaged in the reproduction and appreciation of the likenesses of historical literati. When King Jeongjo ordered Yi Myeonggi to copy a portrait of Heo Mok (1595–1682), it was to appease the Namin faction and thereby served to stabilize the political situation. In turn, King Jeongjo composed a respectful eulogy for a portrait of Heo’s political enemy, Song Siyeol (1607–1689), a paramount leader of the Noron faction. The fact that members of the Noron and followers of Song mostly wore Zhu Xi’s deep robe (simui) in their portraits—in contrast to the court officials who were portrayed in their official attire shows symbolically the political checks and balances that the king sought to preserve. In the same vein, Portrait of Kang Sehwang at Age 71 was at the heart of King Jeongjo’s tangpyeong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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