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48년 미소의 38선 정책과 남북갈등의 기원
The 38th Parallel Policy of the US and the USSR during 1945-48
0
조회
0
다운로드
4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초록
38선의 설치는 표면적으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 무장해제 뒤 38선은 미소 양 주둔군의 경계선이 되었다. 미소 양측은 1946년과 1947년에 각각 1차례씩 38선의 정확한 위치판정을 위해 조사활동을 벌였다. 미소는 조사활동을 통해 빈발하던 월경·충돌사건의 감소를 의도했으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미소 양측이 사소한 38선 충돌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엄격한 조사를 수행함에 따라 한국인들도 점차 38선이 미소간의 경계선일 뿐만 아니라 남북한간의 경계선이자 신성불가침의 국경선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1946년 5월이래 38선은 미소 양군의 군사관할구역의 외연을 표시하는 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인들에게 국경선으로 강요되었다. 미소 점령기 동안 38선상에서는 미소간에 수많은 군사적 분쟁이 있었으나 심각한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1948년에 이르러 38선 충돌은 미소의 충돌이 아니라 남북한간의 충돌로 성격이 전환되었다. 미소 양군이 철수한 1948년 1월 15일 이후 남북한간의 38선 충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38선 충돌은 미소 점령기로부터 이월된 것이었다. 1949-50년 시기 38선상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은 그 기원과 원인이 모두 미소 점령에서 배태되어 싹이 트고 성장한 것이었다. 38선 충돌은 기본적 골격과 원인은 미소 양군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이들은 철군하면서 군대와 무기·군수품은 물론 38선 이남·이북의 한국인들에게 군사적 분쟁과 호전성,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남겨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