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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3·1운동의 전개와 일제의 탄압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the Yeongdeok Region 3·1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Suppression of Participants by the Japanese Imper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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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영덕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일 의병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던 대표적 지역이다. 1910년 일본 제국주의에게 국권을 피탈당한 이후 한국인들은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항일 독립 투쟁을 전개했고 세계 정세의 변화에 따라 1919년 3월 1일, 일제에 강점당한 지 8년 6개월만인 3,107일 만에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민족과 국가의 자유 독립을 주창했다. 영덕의 3·1운동은 고종 국장의 참례를 위해 상경한 인사들의 귀향, 조선독립경고문 제작 시도, 독립선언서 소지 귀향, 『매일신보』 보급 등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 기반이 조성되었다. 이에 김세영이 경성에서 귀향해 권태원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영해면에서는 3월 18일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 남여명, 남효직, 박의락, 권상호 등 예수교 세력과 지역 유지들의 주도로 약 2,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은 영해주재소, 영해공립보통학교, 주재소, 보통학교, 면사무소, 우편소 등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공격 파괴했다. 병곡으로 이동한 군중들은 병곡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 파괴했다. 영덕에서 출동한 영덕경찰서장 등 일경들이 해산을 요구하자, 영해의 만세 군중들은 일경들을 공격했다. 축산면에서는 영해를 탈출한 경찰서장 일행을 공격해 부상을 입히고 감금시켰다. 이어 3월 19일에도 성내동 일대에서 6~700명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영덕면에서는 3월 18일 남석동 시장에서 강우근과 이승구가 이끈 인사들이 100여 명과 한국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이어 야소교들의 권유를 받은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 주민 등 700여 명이 구금자 탈환을 시도했다. 창수면에서는 3월 19일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에서 이수각 등의 발의로 약 200명이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4시경 군중들이 태극기 및 나무 몽둥이를 휴대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행진하여 주재소를 공격 파괴했다. 귀가하던 군중들은 일경들이 사전에 소유물을 숨긴 사실을 알고 보관한 집들을 공격해 물건들을 파손시켰다. 지품면에서는 3월 19일 원전동 시장에서 주명우 등 원장동의 야소교 인사들의 주도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오에 주명우는 종이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 연설을 하여 군중들의 참가를 독려했다. 3월 20일에는 신안동에서 임순근, 문의향 등 유림세력의 주도로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4일에는 원전동 시장에서 다시 윤악이, 신분금 2명의 여성들이 독립만세를 이끌었다. 이는 주명우, 김태을이 독립만세를 외쳐 구금 상태에서 부인들이 남편의 뒤를 이어 전개한 독립운동이었다. 남정면에서는 4월 4일 장사동 시장에서 박명방, 정상용 등이 종이 깃발을 배부하고 흔들며 100명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영덕 3·1운동은 대부분이 시장에서 전개되고 참가자는 4,160~4,369명이나 수치화되지 않은 인원을 추계하면 4,300~4,600명 정도가 된다. 주도 인사들은 북장로파 교직자, 양반, 지역 유지 등이었고 여성 주도자로는 윤악이, 신분금이 있었다. 참가자들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이외 고인, 상인, 용인 등이 있었고 학생들도 참가하였다. 연령층은 10대에서 60대까지 참여하였고 30대, 20대가 가장 많았다. 이들은 전체 참가자의 거의 70%에 가까운 비율을 차지하였다. 영덕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군중 1~6명이 사망하고 14~1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체포된 인원은 영해 250명, 병곡 40명, 영덕 20명, 창수 52명, 남정 10명으로 합계 372명이다. 실제는 독립만세 후 일제 군경의 검거 작전이 실행된 것으로 보아 더 많은 인사들이 체포 구금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보안법 등으로 죄명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영해, 병곡, 창수 독립만세운동으로 재판에 회부된 인사 170명은 3·1운동 관련 재판에서 전국 최대 인원이었다. 영덕 전체 재판에 회부된 인사는 209명으로 징역 7년 4명, 4년 9명, 3년 6명, 2년 20명, 1년 6월 40명, 1년 2월 1명, 1년 32명, 1년·집행유예 3년 11명, 10월 5명, 8월 7명, 6월 17명, 1년·집행유예 3년 34명, 태 90 13명, 무죄가 10명이다. 징역 1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은 인사가 112명으로 전체의 53.59%이다. 즉 2명 1명이 징역 1년 이상의 중형을 당하였다.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과 대구지검에서 각각 25명, 44명, 합계 69명이 증거 불충분 및 기예유예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영덕의 3·1운동은 3월 18일~24일까지 1주일과 4월 4일에 7개면에서 9회에 걸쳐 집중적으로 2~30대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독립만세를 활발히 외쳤다. 또한 3월 18일, 19일 2일 사이에 3개 헌병주재소, 2개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공격적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Abstract

The Yeongdeok Region was the violent resistance place of the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UiByeong, 義兵) for the aggression of Japanese Imperialism. And the endless struggle to regain the sovereignty in Chosun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ism colonial policy was resulted in the great historical event,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3·1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Kim seyeong(金世榮) played an important role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Yeongdeok Region. He talked to Kwon taewon(權泰源) against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had a decisive effect to the others. The Independence Movement developed in the first on 18 March in Yeonghae-myeon(寧海面), Byeonggok-myeon(柄谷面), Chuksan-myeon(丑山面), Yeongdeok-myeon(盈德面). In next day, The Yeonghae-myeon(寧海面) and Changsu-myeon(蒼水面) was developed The Independence Movement on 19 March. The Jipum-myeon(知品面) was developed on 19, 20 and 24 March. And The Namjeong-myeon(南亭面) was developed on 4 April. The important person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Jeong gyua(丁奎河), Nam yeomyeong(南汝明), Gang ugeun(姜佑根), Lee suhak(李壽岳), Ju myeongu(朱明宇), Mun uihyang(文義鄕), Park yeongbang(朴明方). In particular, Yun akyi(尹岳伊) in company with Sin bungeum(申分今) developed a hurrah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market of Wonjeondong(園前洞) on 24 March. They was a wife who developed a hurrah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Jipum-myeo and Yeongdeok-myeo. That is, they cried a hurrah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imprisoned situation of their husband. Three police stations(警察官駐在所) and two myeon offices was destroyed for two day, from on 18 March to on 19 March. And The hurrah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mostly developed the local market in the seat of a myeo office. The participant in the Yeongdeok 3·1 Independence Movement were from 4,160 to 4,360 person on the record and estimated to reach from 4,300 to 4,600 if we included the unrecorded participant.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mainly leaded a Bukjjangnopa(北長老派, Presbyterians) teacher, the Confucians(or Yangban(兩班)), the community leaders in the Yeongdeok Region. Of course, the Independence Movement leader was a woman and they were Yun akyi and Sin bungeum. The participant was mostly the farmer and only one part the employed on farms(雇人), the merchant, the workman in manual labor etc. The student participated in Yeongdeok-myeon hurrah. They were mostly a 20s and 30s ages in all ages. They were taken possession of the nearly 70% at the rate of the all participant who was verified the record. The police, military police and soldier arrested the 372 persons on the record. But in reality, there was arrested more than in country village. The 209 person of them received a criminal punishment with the security law(保安法) etc. The more than a year in prison had occupied more than 50% of all punishment person. In addition, the 69 person suffered the non-prosecution disposition.

참고문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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