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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직전 국내 독립운동세력의 정세관과 건국준비운동

Situation 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and Their New Nation-building Movement in World War Ⅱ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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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8·15 직전 국내외 독립운동세력들 사이에서는 독립과 건국을 위한 구체적인 방략이 일치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당면한 전쟁에서 결국 일제가 패망할 것이고, 그 ‘결정적 시기’에 국내외가 연합하여 무장봉기를 통해 조선독립을 완수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해외에는 연합국 진영에 속해 활동하던 한국광복군,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등의 조선인 군사력이 있었고, 국내에는 무장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민중들이 있었다. 이에 국내에서는 경성콤그룹을 비롯한 8·15 직전의 소규모 공산주의그룹들, 국내와 일본 각지에서 선진적인 민중들이 결성한 수많은 소규모 비밀결사들, 그리고 일제패망 직전에 이들을 아울러서 신국가 건설을 준비했던 건국동맹세력이 동일한 정세인식과 독립·건국방략에 입각해 다가올 국면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결정적 시기 무장봉기론’은 일제강점기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조성되어간 정세는, 미국의 원폭 투하와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했으며, 항복 즉시 총독부의 통치권은 조선인에게 이양될 수 있었고, 연합군 역시 이를 인정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건국동맹을 이끌던 여운형은 1945년 8월 시점에서 총독부로부터 치안권 등을 이양 받고, 굳이 무장봉기를 추진하지 않고 곧바로 임시정부를 수립해 연합국의 승인을 받는 방책으로 전환했다. 문제는 종전 이후 세계질서에서 냉전 대립의 조짐에 대해 당시 독립운동세력들이 인지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단을 방지하고 통합된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비책이 부족했다는 한계를 지녔다는 점이다.

Abstract

During World War Ⅱ, among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at home and abroad, It was going to be consistent with the specific strategies for independence and new nation-building. During this period, there were three Korean military forces belonging to the Allied camp at abroad(Independence Army of Korea, Korean Volunteer Army, Korean Unit of The Northeast Anti-Japan Allies), and there were the people, which can cause an armed uprising in Korea. Thus, in Korea,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was preparing for the upcoming year based on the same specific strategies for independence and new nation-building, they were the small Communist groups including Gyeongseong Com-Group, small secret organizations of the people in Korea and Japan, and Chosungeonguk -Dongmaeng led Lyuh Woon-Hyung. By the way, these strategies was the best way to take independence movement forces under Japanese domination. However, due to the US atomic bombing and the Soviet participation in the war, Japan surrendered sooner than expected. So Lyuh Woon-Hyung switched to a another strategy, such as taking over policing from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after establishing an interim government immediately, subject to the approval of the Allied, without necessarily promoting an armed uprising. The problem was a lack of preparedness to prevent the division and establish a unified country, despite going to recognize the signs of the Cold War confron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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