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ERD
논문KCI 등재

1620~1627년 조선의 遼民 인식과 송환론

The Perception of Liaodong Refugees and the Doctrine of Repatriation in Choseon Dynasty from 1620 to 1627

0

조회

0

다운로드

5

인용

0

참고문헌

키워드

주제분류역사학

초록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본격화된 후금의 서진으로 말미암아, 요하 유역 漢人들이 대거 압록강을 넘어 조선 영토로 피난하면서 요민 문제가 시작되었다. 1621년 후금의 瀋陽·遼陽 점령 및 1622년 毛文龍의 東江鎭 설치로 급격히 증가한 요민의 숫자는 순식간에 2만을 넘어 1623년 인조반정 무렵 10만, 1627년 정묘호란 직전에는 20~3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이 숫자를 그대로 믿기란 쉽지 않지만, 적어도 10만 명에 가까운 한인들이 평안도로 유입된 정황은 대략 확신할 수 있을 듯하다. 조선 조정은 요민들이 후금과 내통하거나 후금의 월경 침입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평안도 백성들에 대한 침학 및 굶주림으로 인한 소요를 우려하며, 유입 초기부터 이들을 산동성 登州로 송환하는 방침을 정하고 명 조정과 협의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명 조정 역시 자국민인 요민을 데려오는 것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여, 감군 梁之垣과 조사 姜曰光의 파견 때 송환을 성사시킬 기회가 두 차례 있었다. 그러나 요민을 기반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유지하려던 모문룡의 방해, 그리고 동강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고 요민 귀환으로 인한 혼란을 우려했던 명 조정의 복잡한 계산 속에서, 정묘호란 이전 요민의 송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Abstract

After the Battle of Sarhu in 1619, as the Manchus advanced westward, many Chinese living near Liaohe fled over the Yalu River to Choseon territory, and the issue of Liaodong Refugees began. The number of Liaodong Refugees, which increased rapidly due to the occupation of Shenyang and Liaoyang in 1621 and the establishment of Dongjiangzhen by Mao Wen-long in 1622, quickly exceeded 20,000. 100,000 by the time of King Injo’s Rebellion in 1623, and 200,000 to 300,000 just before the 1st Invasion of Manchuria in 1627. It is not easy to believe this number as it is on the record, but it is roughly certain that at least nearly 100,000 Chinese have flowed into Pyongan Province. The Choseon Dynasty was concerned that Liaodong Refugees could communicate with the the Manchus or cause invasion of the Manchuria, and they would plunder the local people. Therefore, from the beginning of the influx of Liaodong Refugees, Choseon Dynasty decided to repatriate them to Dengzhou, Shandong Province of Ming, and continued consultations with Ming Dynasty, In addition, the Ming Dynasty also agreed in principle to repatriate Liaodong Refugees, its own citizens, and there were two opportunities to complete repatriation when Yang Zhi-yuan and Jiang yue-guang were dispatched. However, in the complicated calculation of the Ming Dynasty, which valued the strategic value of Dongjiangzhen, and the obstruction of Mao Wenlong, who tried to build and maintain his power based on Liaodong Refugees, little repatriation of Liaodong Refugees was accomplished.

참고문헌 (28)

  1. "光海君日記", ~
  2. "仁祖實錄", ~
  3. "明神宗實錄", ~
  4. "明熹宗實錄", ~
  5. "淸太祖實錄", ~
  6. 李廷龜, "月沙集", ~
  7. 金尙憲, "淸陰集", ~
  8. 趙翼, "浦渚集", ~
  9. 黃景源, "江漢集", ~
  10. 田川孝三, "毛文龍と朝鮮との關係について" (1932), 彙文堂書店
  11. 권내현, "조선 후기 평안도 재정 연구" (2004), 지식산업사
  12. 김종원, "근세 동아시아관계사 연구" (1999), 혜안
  13. 우경섭, "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 (2013), 유니스토리
  14. 정병철, "‘天崩地裂’의 시대, 明末淸初의 華北社會" (2008), 전남대학교 출판부
  15.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1999), 역사비평사
  16.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2009), 푸른역사
  17.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1" (2013), 푸른역사
  18. 김덕진, "17세기 전반 후금의 요동진출과 요민의 조선이주", 역사와 교육, 14 (2012), 역사와 교육학회
  19. 김두현, "遼東支配期 누르하치의 對漢人政策", 동양사학연구, 25 (1987), 동양사학회
  20. 劉春蘭, "明·淸交替期 漢族의 朝鮮移民", 석사, pp.1997
  21. 박현규, "명 監軍 梁之垣 朝鮮出使 시기 해상활동에 관한 분석", 한중인문학연구, (39), pp.359~384 (2013), 한중인문학회
  22. 서원익, "明淸交替期 東江鎭의 위상과 경제적 기반", 명청사연구, (53), pp.97~139 (2020), 명청사학회[DOI]
  23. 스즈키 카이, "劉興治와 朝鮮과의 관계에 대하여", 만주연구, (19), pp.142~182 (2015), 만주학회[DOI]
  24. 장정수, "17세기 전반 朝鮮과 後金·淸의 國交 수립 과정 연구", 박사, pp.2020
  25. 정병철, "明末 山東과 遼東間의 交流와 그 性格", 명청사연구, 3 (1994), 명청사학회
  26. 정병철, "明末 遼東 沿海 일대의 ‘海上勢力’", 명청사연구, (23), pp.143~170 (2005), 명청사학회
  27. 조일수,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비평, (121), pp.343~371 (2017), 역사문제연구소[DOI]
  28. 허태구, "張晩의 대외정세 인식과 대중국 외교현안 대응", 대구사학, 146, pp.199~238 (2022), 대구사학회

관련 논문AI추천

이 간행물의 다른 논문 (13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