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齋 尹拯과 德村 梁得中의 學問 交遊考
An Examination of the Academic Intercourse Between Myung Jae(明齋) Yoon Jeung(尹拯) and Deok Chon(德村) Yang Deuk-joong(梁得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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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명재 윤증과 덕촌 양득중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들이다. 특히 명재는 86세로 세상을 떠나기 이전까지 조정으로부터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김집과 송시열 등으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 양명학에도 밝았으며, ‘무실(務實)’을 강조하여 실학적 측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학문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덕촌 양득중은 돋보이는 인물이었다.양득중은 숙종 때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벼슬에 나아간 이래 영조에게 ‘실사구시’의 정신을 강조한 인물로 유명하다. 백성들의 현실적 삶이 조정의 절박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으나, 당시 경연에서는 아직도 주자어류를 핵심 교재로 강론을 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영조에게 주자어류 대신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힘써 공부할 것을 권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그러한 노력은 영조가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정치를 펼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양득중의 그런 학문적 성격은 스승 명재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윤증과 양득중은 스승과 제자간이었으나 삶의 방식이나 태도는 달랐다. 그러나 진리 추구에 있어서는 열린 마음과 자세를 보여 주었다. 명재는 덕촌에게 개방적 태도로써 동료적 대우를 하였고, 덕촌은 스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이와 같이 진리 추구에 있어서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던 점은 당쟁이 치열하였던 당시 학문 풍토에서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은 성리학의 본령에 정통하면서도 양명학이나 실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워 현실에서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도 두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넘어 교학상장하는 실질적인 학문적 태도를 보인 것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있다.
Abstract
An Examination of the Academic Intercourse Between Myung Jae(明齋) Yoon Jeung(尹拯) and Deok Chon(德村) Yang Deuk-joong(梁得中) / Lee, Sang-sung
참고문헌 (10)
- 德村集, "韓國文集叢刊"
-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 영조실록, 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 崔英成, "韓國儒學思想史", Ⅲ (1995), 아세아문화사
- 李相星, "정암 조광조의 도학사상" (2003), 심산
- 李相星, "한국도학의 태산북두 조광조" (2006),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얼굴없는 재상 윤증의 상소와 편지" (2004), 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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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劉明鍾, "明齋 尹拯의 務實學", 26집, 韓國哲學硏究會
- 劉明鍾, "朝鮮朝 陽明學과 그 展開" (1987), 韓國哲學會 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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