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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典牲暑의 인적구성과 기능 - 黃胤錫의 <頤齋亂藁>를 중심으로 -

The Organization and Operation of Jeonsaengseo(典牲暑) In the 18th Century Based on Hwang, Yeon-seok(黃胤錫)'s "Ijaenango(頤齋亂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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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조선시대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만큼 국가제사 또한 이를 기반으로 시행되었다. 전생서는 이런 국가제사의 희생동물의 공급을 담당했으므로 안 될 중요한 관서였다. 본고는 황윤석이 쓴 일기인 『이재난고』 가운데, 그가 전생서 主簿를 맡았던 1786년(정조 10) 기록을 중심으로 당시 전생서의 인적구성과 운영 모습을 살펴본 것이다. 전생서는 고려시대의 掌牲署를 계승하여 국초에 ‘典廐署’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1460년(세조 6)에 전생서로 이름이 바뀌었고, 관서는 남대문 밖 남산 남쪽 屯智坊에 설치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예조의 종6품아문으로서, 제조 1명, 주부 1명, 직장 1명, 봉사 1명, 참봉 2명, 서리 8명, 庫直 3명, 사령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황윤석이 전생서에 있었던 당시에는 제조, 주부, 직장, 봉사 각각 1명, 그 외 吏隸가 근무하고 있었다. 이후 1797년(정조 21)에는 주부를 判官으로 승격시킴으로써 종5품아문이 되었다. 1865년(고종 2)의 『대전회통』에는 전생서의 관원을 대폭 감원하여 제조 1명, 판관 1명, 직장 1명, 부봉사 1명만이 배치되었다가 1894년 관제개혁으로 모두 폐지되었다. 전생서의 三官은 蔭官 자리로 당시에는 士大夫 중 庶類들이 많이 가는 자리였다. 특히 주부는 음관 중에서도 지벌이 좋고 명망 높은 자가 임명되었고, 외방 수령으로 나아가기 좋은 위치였다. 전생서의 실무를 맡고 있던 吏隸 21명 중에서 15명이 당시 권세가의 廳直이나 下人이었다. 권세가의 청지기로 전생서의 서원이 된 이들은 전생서의 官屬 중에서 상급서리에 해당되었는데, 都家를 중심으로 경제적인 이득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특이한 것은 황윤석이 근무하던 당시 전생서 서리들과 연관된 권세가들이 대개가 남인과 소론계였다는 점이다. 전생서의 관원은 帽子, 曆書, 試紙, 黃燭, 땔감, 무(菁根), 賻儀品, 丘價 등을 공식적으로 지원받았다. 三官은 3일씩 入番했고, 掌務官은 주부가 初旬, 직장이 中旬, 봉사가 下旬을 맡았으며, 이들은 전생서 제조와 예조당상에게 褒貶을 받았다. 전생서의 업무분장을 보면 주부는 소, 직장은 양, 봉사는 돼지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다. 종묘를 비롯한 각 종의 정기제사와 특별제사 등에 쓰이는 희생물도 그 종류에 따라 담당 관원이 進拜했다. 한편 영조 때부터 시작된 省牲의 親行으로 인하여 희생의 상태에 대한 책임이 더욱 무거워졌다. 전생서의 희생물은 元貢을 통해 조달되었고, 희생물의 원공 수효는 정기적인 제사에는 충분했지만 부정기적 제사에 까지 항상 충분하지는 않았다. 전생서에서 항시적으로 기르는 수효를 통해 이런 유사시를 대비했다. 본고는 황윤석이 전생서주부로 재임했던 짧은 기간의 기록이라는 점과 개인일기라는 자료상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벽과 꼼꼼한 성격에 힘입어 전생서 인적구성의 많은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고 관찬사료에서 볼 수 없는 이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생서의 재정적인 운영과 권세가의 겸인으로 중앙관서의 서리가 된 부류에 대해서는 후고를 준비할 예정이다.

Abstract

Joseon government had performed many national rituals based on Confucianism. Jeonsaengseo(典牲暑:office of Sacrifice) in charge of animal sacrifices was one of important departments.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organization and operation of Jeonsaengseo recorded in Hwang, Yeon-seok(黃胤錫)'s "Ijaenango(頤齋亂藁)" in the 18th century. Jeonsaengseo was originally founded in 1392, started with the name of 'Jeonguseo(典廐署) in succession to Gorye(高麗) Dynasty's 'Jangsaengseo(掌牲署)', and acquired its name in 1460. The office building was located in Dunjibang(屯智坊) outside Southern Gate(南大門). "Gyeongguk Daejeon(經國大典:Complete Code of Law)" shows that Jeonsaengseo was organized with 1 Jejo(提調), 1 Jubu(主簿), 1 Jikjang(直長), 1 Bongsa(奉事), 2 Chambong(參奉), 8 Seori(書吏), 3 Gojik(庫直) and Saryeong(使令). But when Hwang, Yeon-seok was served as Jubu, it consisted of 1 Jejo, 1 Jubu, 1 Jikjang, 1 Bongsa, and some Yije(吏隸;petty official and clerk). Three posts of Jeonsaengseo(Jubo, Jikjang, Bongsa) were regarded as Eumgwan(蔭官;protected officials) and filled mostly with illegitimate birth(庶類) among the literati class(士大夫). Particularly well-reputed Eumgwan(蔭官) easily earned the position of Jubu which had a good chance of being promoted to a local Suryeong(守令:magistrate). There were 21 Yiye out of whom 15 people were Cheongjik(廳直:house steward) of Gweonsega(權勢家:top officials), taking charge of tribute. It is notable that most of the people linked with Seori were Namin(南人) and Soron(少論). Officials of Jeonsaengseo received benefit of many stuffs like a hat, a calendar, some paper, firewoods, vegetables, and etc. They had to work for 3 days in turn and were on 10 days duty every month. They should get their evaluation by Jejo(提調) and Yejo(禮曹:Ministry of Rites) Dangsang(堂上:Senior Third Rank). Their work was separated; Jubo took care of matters on cattle, Jikjang on lambs and Bongsa on pigs. Their responsibility for animal status was much heavier than ever as the King Youngjo(英祖) began to check up the sacrifice himself. Making money with beans to fed sacrifice animal was one of their jobs. This study provides valuable information on the organization and operation of Jeonsaengseo from Hwang, Yoon-seok's detailed diary, Ijaenango and offers insights into the process that Seori kept trying to make their own class by connecting with Gweonsega and taking control of working level administrative jobs and economic concession in th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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