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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 류성룡의 양명학 이해에서 보이는 중층성 해명 - 17세에서 29세 사이의 기록을 중심으로

A Elucidation of the Middle Layer of Yangming Theory Narrative and Understanding by Ryu Seong-ryong - Focusing on records between the ages of 17 and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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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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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류성룡의 양명학 이해에 보이는 중층성 문제를 청소년기의 기록과 당시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해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류성룡의 학문이 퇴계에게서 수학하기 전 이미 가학에서 그 기초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가정하에, ①17세(1558년, 명종 13년) 관련 기록, ②27세(1568): 양명학 수용의 흔적, ③28세(1569): 양명학 비판에 대한 이해에 주목하면서 관련 내용의 사상적 맥락과 배경을 살펴보았다. 류성룡은 17세 때 처음 『양명집』을 접하고서 기뻐서 부친에게 말씀드리고, 글씨 잘 쓰는 아전을 시켜 베껴 내게 하여 상자 속에 35년간 간직한다. 그런데, 임진년(1592) 7월에 왜구가 안동 옛집과 원지정사를 불사르니 집의 서적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다만 『양명집』몇 권만이 수풀 사이에 있어 온전하여 그것을 다시 보니 불각 중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슬퍼한다. 그는 그 사실의 대강을적어 자제로 하여금 잘 보존하고 다시 유실되지 않도록 이르고 있다. 이런 대목에서 고려할 수 있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 류성룡이나 부친의경우 양명학에 대해 반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 부친이 양명학에 대해별다른 경고를 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은 당시 양명학 비판 분위기에 연관돼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③ 류성룡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오는 신지식과 문물에대해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신선한 자극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④ 류성룡은 생애에 걸쳐 『양명집』자체(=자료 및 내용)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류성룡이 17세 때 처음 접한 『양명집』은 『왕양명전집』 광덕본(1527)과 고소본(1535) 중의 하나일 것이나, 그 속에는 당연히 『전습록(傳習錄)』이 포함돼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류성룡이 『전습록』을 접했다면 그것은 초간본(1518) 이 간행된 뒤 40년이 지난 시점이며, 아울러 퇴계의 육왕학에 대한 공식 비판(퇴계 53세, 1553)이 시작되고 나서 5년 뒤의 일이다. 류성룡은 퇴계를 만나기 전에 육왕학에 대한 경계나 비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양명학에 대해 경계심 및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은 21세 되던1562년(명종 17년) 9월 도산(陶山)으로 퇴계를 찾아가 수개월 간 머무르면서『근사록(近思錄)』 등을 수업받고 나서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27세(1568) 때시에서도 양명학 수용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이후 28세(1569)에 보인 류성룡의 본격적인 양명학 비판, 그리고 29세 때퇴계가 류성룡에게, “온 천하에 퍼진 육왕학에 대해 정론을 펴서 잘 지적했다” 는 언급은 류성룡의 삶에서 공식적인 지침이 되기에 충분했다. 퇴계가 지키고자 했던 정학(正學)으로서의 주자학과 ‘이학(異學)=이단’으로서의 육왕학에 대한 분별 의식은 류성룡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류성룡은 양명학에 동조하고 있는 선조에게 ‘실제적인 측면’은 인정하나 ‘심위주(양지, 치양지)’와 ‘공부 소홀’ 측면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처럼 류성룡은 존덕성(主心, 致良知)과 도문학(主理, 격물궁리)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이 둘 중에 방점이 놓인 것은 역시 그의 실천적, 창의적, 역동적 면모를 추동한‘존덕성’ 쪽이었다고 생각된다.

Abstract

Focusing on the records of adolescence and the ideological backgrounds of the time, this paper elucidates the middle layer of Ryu Seong-ryong's approach to Yangming Learning. Ryu Seong-ryong’s scholarship was well established in his early years before he studied under Toegye Yi Hwang’s (李滉, 1502-1572) guidance. Sources show that from in the year of 1558, when he was no more than seventeen, Ryu Seong-ryong came across Wang Yangming’s (王陽明, 1472-1529) literary collection. He recounted the gratifying experience of reading Wang Yangming’s writings to his father, and produced a hand-copied version of the Wang Yangming’s literary collection, which he kept for thirty-five years until it was burned during the Imjin War. This article addresses the following points: (1) neither Ryu Seong-ryong nor his father had antipathy towards Yangming learning; (2) his father did not caution Ryue against Yangming learning, which shows that he did not agree with the anti-Yangming voices of Joseon literati at the time; (3) It seems that Ryu Seong- ryong was excited to learn new intellectual trends from Ming China; (4) in his later years, Ryu Seong-ryong seems not to have lost interest in Yangming learning. Before meeting with Yi Hwang, Ryu Seong-ryong was far from being critical of Yangming learning. At the age of 21, he began to be critical of Yangming learning. In 1562, Ryu Seong-ryong studied at the Dosan Academy in Andong for several months. The influence of Yangming learning on Ryu Seong-ryong is shown in a poem he wrote at the age of 27 in 1568. In 1569, under the heavy influence of Yi Hwang, Ryu Seong-ryonhg criticized Wang Yangming and the relevant scholars, which Yi Hwang unhesitatingly endorsed. To King Seonjo who also developed a fondness for Yangming learning, Ryu Seong-ryong emphasized that importance of balance in learning between respecting innate virtue and learning the way. Between the two, it was that Ryu who set great store by the practicality, creativity, and dynamism of the mind was more intent on respecting innate 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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