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就利山會盟과 唐의 百濟 故土 支配 政策

就利山会盟与唐朝支配百济政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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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초록

당이 선택한 백제 고토 지배전략은 신라와의 군사적인 충돌 없이 신라군이 철군하도록 유도하 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은 백제 고토를 손쉽게 직할영토로 편입하여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 지로 이용하고, 熊津都督府를 이용해 신라를 견제하기에도 편리한 이점이 있었다. 당은 국가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중재하는 중국의 전통적 방식인 ‘會盟’을 통해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먼저 백제의 扶餘隆을 熊津都督府의 都督으로, 신라의 文武王을 鷄林大都督府의 都督으로 임명하여 분쟁의 당사자들로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당 高宗은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후에 웅진도독부와 신라가 회맹하라는 勅命을 내렸다. 백제 고토의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신라군 의 주둔 자체를 웅진도독부와 계림주대도독부와의 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중재한다는 명분으로 양자가 회맹하도록 한 것이다. 664년 2월의 웅령 회맹은 신라 문무왕의 참석 거부로 부여융과 김인문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회맹의 기본적인 목적이 영토 劃定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웅령은 오늘날의 충북 보은군 내북면 곰치이다. 웅령에서 회맹했다는 것은 결국 웅령으로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삼은 것이다. 당은 신라가 새로 점령한 백제 영토를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신라 문무왕은 이에 자 신이 직접 회맹에 참여하지 않은 웅령 회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시 회맹할 것을 요구했다. 당과 신라는 웅령 회맹의 문제점을 조율하기 위하여 1년 반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하여 665년 8월 유인원의 중재로 취리산에서 문무왕이 직접 참여한 가운데 부여융과 다시 회맹을 하게 되었다. 당은 왜와 탐라 사신을 회맹에 입회토록 함으로써 신라가 약속을 어기지 못하도록 외교적으로도 압박했다. 취리산은 오늘날의 충남 공주시 금강 對岸이다. 취리산 회맹으로 신라는 좀 더 나아진 조건으로 웅진도독부와 영토를 획정하게 되었다. 반면에 당은 신라의 백제 침탈을 막을 수 있는 근거를 확고히 마련했고, 백제 고토에 대한 직접지배를 본격화했다. 그리하여 백제 고토를 웅진도독부와 7주 51현으로 새로이 편제하여 항구적인 지배를 도모했다. 취리산 회맹으로 신라는 백제 멸망 이전의 국경선으로 경계를 획정하려던 당의 계획을 무산시 키고, 신라가 실질적으로 점령하고 있던 백제 고토에 대한 영유권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그러 나 백제의 나머지 영토는 당의 기미부주로 편제되어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지가 되었고, 당분간 신라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Abstract

唐朝为了控制百济,诱导新罗无冲突下撤军,并欲把百济列为自己的直辖领土,这样唐朝就可以利用 百济故土征伐高句丽的前哨基地,又可以利用熊津都督府牵制新罗。唐朝打算通过“会盟”达成目的。为 此首先任命百济的扶余隆为熊津都督府都督,同时任命新罗的文武王为鸡林大都督府都督,赋予他们平 等的行使权。然后唐高宗平定了百济扶余军,并下达了新罗与熊津都督府进行会盟的敕命。因为新罗军 驻在百济故土的情况属于熊津都督府与鸡林大都督府之间的内部纠纷,所以要以仲裁双方的名义来让他 们参加会盟。 664年2月,新罗文武王拒绝参加熊岭会盟,只有扶余隆与金任文参加了会盟。会盟的主要分歧是领土 划定问题。唐朝把熊岭指定为百济与新罗的分界线(熊岭位于今天的忠北报恩郡内北面)。唐朝始终没有 承认新罗占领的百济故土,因此新罗文武以自己没有参加这次熊岭会盟为理由,强烈要求再次会盟。 唐朝与新罗为了调整熊岭会盟的分歧问题历经了一年半的时间。终于在665年8月,于刘仁愿的仲裁协 助下,文武王与扶余隆在就利山召开了会盟(就利山位于今天的忠南公州市锦江对岸)。并且唐朝还允许 倭使与耽罗使臣参加会盟,新罗由于受外交上的压力不易毁约。通过此次会盟,在比较合理的条件下划 给新罗熊津都督府与新占领土,而唐朝为了防止新罗进攻百济,制定出了一系列政策。之后开始正式控 制百济,百济故土被划分为熊津都督府与7州51县,力图永久支配百济。 通过就利山会盟,唐朝要把百济灭亡之前的国境划定为当时的国境线,但是新罗阻止了那样的划分计 划。虽然新罗占领的百济故土的所有权得到了一定的承认,但是除了新罗占领的百济故土,剩下的百济 故土被划分为唐朝的羁縻府州,成了征伐高句丽的前哨基地,新罗暂时无法行使支配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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