準王南來說에 대한 비판적 검토 -조선유민의 마한 유입과 관련하여-
A Critical Review on the Theory of King Chun's(準王) Southward Migration - Considering the Influx of Chosŏn Migrants into Mahan(馬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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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 초 準王이 위만에게 쫓기어 ‘韓地’로 망명하여 ‘韓王’이라 칭하였다고 하는‘準王南來說’은 280년대 편찬된 陳壽의 『三國志』에서 처음 보인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魏略』(260년대 편찬)과 『潛夫論』(2세기 편찬)에서는 준왕의 망명지역을 막연하게 ‘海中’이라고만 기록하여, ‘韓地’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삼국지』와 차이가 난다. 준왕남래설에보이는 ‘韓王’, ‘韓地’의 용어는 後漢 이후 알려진 지리 정보에 의해 후대의 진수가 추가로기록해 넣은 것이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의 준왕이 ‘韓地’에 가 ‘韓王’이 되었다는 것은역사적 서술이 아니며, 이를 포함한 준왕남래설 자체도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윤색된것임을 시사해준다. 『삼국지』에서 준왕을 箕子의 40여 세 孫으로 기록한 것은 자신들의家系를 기자나 준왕과 연결시키고자 했던 후대의 씨족, 특히 樂浪지역 韓氏나 王氏의계보에 근거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낮다. 준왕이 기자의 후손이며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라는 점에서 준왕의 존재는 기자동래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삼국지』에 이르러준왕의 말로가 기존과 달리 ‘한지’로 바뀐 배경도 기자동래설의 연장을 통해 기자 교화의외연을 확대하고자 한 중화적 인식의 발로와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준왕남래설은 기원전2세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後漢 桓靈帝 이후 낙랑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韓에유입한 조선계 유민 집단의 존재로 인해 파생된 부회라고 판단된다. 진수가 『삼국지』편찬 과정에서 『魏略』 외에 군현지역 씨족의 계보나 군현에 출입했던 韓의 상인을 통해수집된 정보를 참고하였을 것인데, 그 가운데 擬制的이나마 자신들의 가계를 준왕과 연결시켰던 조선계 유민 집단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과거에 준왕이 韓으로망명했다고 오인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Abstract
The theory of King Chun's southward migration to the area of Han(韓) in the early second century B.C. could be seen in Sankouchih(三國志) complied by Chen Shou(陳壽) in the 280's. However there was a difference between the previously compiled Weilueh(魏略) and Qianfulun(潛夫論), which have ambiguously recorded the destination of King Chun's migrating into an ocean, and the detailed records of Sankouchih. The terms such as 'Han(韓)' in the theory of King Chun's southward migration was added by Chen Shou in accordance with the geographical knowledge after the period of the Later Han. Therefore, that King Chun migrated to 'Han' and then became the king of 'Han' cannot be a historical record, and the theory of King Chun's southward migration, including this term, is embellishment by later historians. Since the record of Sankouchih that King Chun was approximately fortieth descendent of Kija was based on pedigrees of later generations, especially Han families' in the Lolang(樂浪), who pretentiously attempted to include Kija or King Chun to their lineage, its historical value is questionable. Yet the existence of King Chun cannot be free from the theory, in regard of that King Chun was a descendent of Kija and the last king of Kija-Chosŏn. Unlike former historical records,Sankouchih's sudden change of King Chun's final destination to 'Han' was to widen Kija's reach of enlightenment in Korea through the extension of the theory of Kija's migration. It was, supposedly, related to the consciousness of Sino-centrism. Thus, the theory of King Chun's southward migration could be concluded as a farfetched record which originated from the old Chosŏn people in Loland and Daifang (帶方) migration to the Han area after the late second century A.D.. Chen Shou would have referred to the pedigree of the families in the Chinesamiloesnces in Sankouchih. Ihe familocess, it is supposed that Chen Shou misunderstood that King Chun had taken asylum in the Han area because the Chosŏn migrators from Loland and Daifang to Han retroactively regarded their ancestors connected to King Chun and held a pretentious memorial rites for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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