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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日戰爭 당시의 戰爭見聞錄을 통해서 본 전쟁지역 민중의 삶

Sino-Japanese War and Korean and Chinese people's lifewith a record of personal war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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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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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戰爭見聞錄의 내용을 중심으로 전쟁지역 민중의 고통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제 1장에서 전쟁견문록을 조사․수집하여 분석한 후, 제2장에서는 전쟁지역 민중의 삶을 밝히기 위해 1절에서 徵發로 인한 고통, 2절에서 물가폭등과 기근, 3절에서 掠奪․放火․强姦․虐殺, 4절에서 시체처리․전염병․性病 등 衛生問題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맺음말에서 전쟁지역 민중의 정신적 고통을 언급하였다. 제 1장에서 일본․중국에 전하는 전쟁견문록 51편을 정리하여 표로 작성하였다. 일본인이 남긴 견문록이 중국에 비해 월등히 많으며, 기록자의 신분도 다양하다. 서양인으로는 영국인 선원이 쓴 견문록 1편이 있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이 남긴 견문록은 없다. 그런데 일본측의 견문록은 일본군의 용맹한 분투장면을 과장한 측면이 많고, 전쟁지역 민중의 고통에 시각을 둔 서술을 찾기 힘들다. 약탈․방화․강간은 淸兵의 소행이었고, 일본군은 문명국의 군인으로서 엄격한 규율하에 국제법을 준수하며 전쟁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전쟁 당시 기사나 편지에 대해 검열이 시행되었다. 전쟁지역 민중의 징발로 인한 고통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경우, 전쟁 당시 정식의 병참규정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실제의 운용은 전혀 달랐다. 淸의 경우 병참이론이나 기술․경험이 부족하고, 군대이동 및 군수물자의 조달․수송 등에 대한 조직체계가 전혀 수립되어 있지 않았으며, 운송은 지나가는 沿道의 지방민이 부담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처럼 청․일 양국이 기본적으로 전쟁을 치루기 위한 병참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데에다 이들 나라의 조선 출병에 대한 의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일본측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대신 싸워준다는 義戰論이 팽배해 있었고, 청군은 속국인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출병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淸․日 兩國은, 조선을 위한 출병이니 조선이 적극적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하고 役夫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조선은 양국으로부터 役夫, 牛馬, 軍糧, 馬草 등의 징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어떠한 종류의 징발보다도 민중에게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役夫’ 징발이었다. 조선과 청의 역부는 일본군에 의해 채찍과 곤봉으로 감시당하며 때론 가축처럼 취급되었다. 전쟁기간 조선과 청의 민중은 ‘살인적인 물가와의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조선의 경우, 물가가 지역에 따라 2-6배 까지 올랐다. 특히 경상도 지역은 旱魃로 인해 기근이 심하였다. 淸의 경우 전쟁지역이 자연재해(홍수) 지역과 겹치거나 혹은 인접해 있어 민중의 고통이 倍加하였다. 奉天省 지역에서는 수십만의 饑民이 떠돌아 다녔고, 길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하였다. 또한 전쟁지역 뿐만 아니라 福建․廣東地域에도 쌀 부족이 심하여 민심이 흉흉했는데 이는 淸政府의 ‘禁米出洋’정책 때문 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 20만이 넘는 일본군인과 軍夫가 쳐들어 가니 물가는 폭등하다 못해 物資가 동이 나버렸다. 掠奪․放火․强姦․虐殺의 실상을 보자. 조선에 들어온 淸兵은 아산전투와 평양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길에 이같은 온갖 蠻行을 자행하였고, 청정부도 이미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衛汝貴가 이끄는 盛軍의 군기가 가장 문란하였고, 이로 인해 위여귀는 ‘軍糧 가로채기와 병사를 풀어 약탈한 행위’로 斬刑에 처해졌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의 경우 軍夫의 罪行이 심하였는데 당시 軍夫 가운데에는 야쿠자 출신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중국의 민중은 日本軍 뿐 아니라 自國의 敗殘兵과 土匪에 의한 蠻行의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조선과 중국에서 일본병과 청병의 약탈이 심하였던 까닭은, 전쟁 당사국 모두 軍糧이나 馬草 등 軍需物資를 준비하지 않은 채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첫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는 그나마 준비한 군수물자의 調達 속도가 군대의 進軍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여 병사들이 굶주리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이다. 양국의 군대가 모두 放火를 일삼았는데 淸軍의 경우는 후퇴하면서 堅壁淸野를 목적으로 한 경우가 많았고, 일본군의 경우는 집집에 숨은 패잔병을 소탕하기 어렵자 시가지를 불태워 초토화 시켜버렸다. 일본군은 또한 포로를 끌고 다니며 감시해야하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하여 투항하는 패잔병도 모두 학살하였다. 청일전쟁 당시 전쟁지역에서는 이질, 말라리아, 콜레라, 장티푸스, 痘瘡, 性病 등이 유행했다. 조선에서는 평양전투 직후 이질의 병세가 극심하였으며 다른 지역의 전염병에 비해 환자가 가장 많았다. 이는 9월의 더운 날씨와 暴雨 속에 2500 具가 넘는 시체가 방치되었던 데에 기인한다. 콜레라는 만주의 金州지역에서 1895년 3월경 발생하였다. 겨우내 만주벌판의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시체가 봄이 와 얼음이 녹으며 위생상의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추론된다. 콜레라는 한편으로는 義州를 거쳐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조선인 30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다를 통해 팽호열도․대만․일본 등지로 확대되었다. 한편 전쟁당시 일본 군대에 퍼진 性病의 실상을 보면, 1894년 6월부터 1895년 12월까지 성병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수가 2,416명이다. 성병이란 다른 병과 달리 노출시키기를 꺼리는 병이라는 점, 그리고 가벼운 증상의 경우 단순한 통원치료를 받아도 되는 병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전쟁 수행중 ‘입원환자’의 수치가 이 정도라면 사실상 성병을 경험한 환자의 숫자란 우리의 상상을 넘는 수일 수 있다. 일본의 野戰衛生長官은 大本營에 올린 의견서에서, 公娼을 허가하고, 이를 통해 성병검사를 철저히 하는 것만이 대책이라 하였다. 이밖에도 野戰衛生長官이 제시한 소위 성병예방대책의 내용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추진한 ‘종군위안부’정책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전쟁지역 민중의 정신적 고통을 보자. 조선 민중은 일본측의 징발에도 응해야 했고, 동시에 중국측의 징발에도 응해야 했다. 그런데 일본측의 징발에 응할 시 때로는 동학운동 세력이나 反日抵抗 세력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더 비극적인 사태는 평양전투 당시 힘없는 조선정부는 淸․日 兩國의 지원병 요청에 굴복하여 양 측으로 조선 병사를 파병하였고, 그 결과 조선 민중은 동족끼리 싸우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봉착하여 깊은 정신적 상처를 안게 되었다는 점이다. 淸의 민중 역시 정신적인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은 점령지역에 行政廳을 설치한 후 귀순하는 戶에만 ‘大日本順民’이라 적힌 標札을 주고 보호를 약속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웃끼리도 귀순 여부를 놓고 상호 반목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중국인을 매수하거나 납치해서 첩자로 투입시켰고, 이를 잡기 위해 중국 정부가 현상금을 걸자 중국인끼리 서로 오인하여 신고해서 1000 여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결국 같은 민족끼리 상호 의심하며 살해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Abstract

この研究は戰爭見聞錄の内容を中心に、戦争地域の民衆の苦痛を明らかにしようとしたものである。 第1章で戦争見聞録を調査․収集して分析した後、第2章では戦争地域の民衆の生活を明らかにするために1節で徵發による苦痛、2節で物価暴騰と飢饉、3節で略奪․放火․强姦․虐殺、4節で死体処理․伝染病․性病など衛生問題に注目した。そして結びで戦争地域民衆の精神的苦痛について言及した。 第1章で日本․中国に伝わる戦争見聞録51編を整理して表を作成した。日本人が残した見聞録が中国に比べてはるかに多く、記録者の身分も様々である。西洋人としては英国人船員が書いた見聞録1編があるだけである。残念なことに韓国人が残した見聞録はない。しかし日本側の見聞録は日本軍の勇敢な奮闘場面を誇張した傾向があり、戦争地域民衆の苦痛に視点を置いた部分はほとんどない。略奪․放火․強姦は淸兵の仕業であり、日本軍は文明国の軍人として厳格な規律の下で国際法を順守し、戦争を行ったと記録されている。日本では戦時中記事や手紙は検閲が行われていた。 戦争地域の民衆の徴発による苦痛は次の通りである。日本の場合、戦争当時正式な兵站規定が定められていたが、実際は全く違っていた。淸の場合は兵站理論や技術․経験が不足で、軍隊移動及び軍需物資の調達․輸送などに対する組織体系が全く樹立しておらず、運送は通りがかりの沿道の地方民が負担すればよいという考えであった。このように日․清両国が基本的に戦争をするための兵站準備が整っていない上に、両国の朝鮮出兵に対する意識にも問題があった。日本側には朝鮮の独立のために代わりに戦ってやるという義戰論が広がっており、清軍は属国である朝鮮を日本から救ってやるために出兵するという意識であった。よって淸․日両国は、朝鮮のための出兵であるから朝鮮が積極的に軍需物資を調達して人夫を提供するべきだとの考えであった。その結果朝鮮は両国から人夫、牛馬、食糧、馬の餌などの徴発に苦しめられた。しかしどんな種類の徴発よりも民衆に恐ろしく苦痛であるのは ‘人夫’ 徴発であった。朝鮮と清の人夫は日本軍により鞭と棍棒で監視されて時には家畜のように扱われた。 戦争時朝鮮と清の民衆は‘殺人的な物価との戦争’を行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朝鮮の場合、物価が地域によって2-6倍にもなった。特に慶尚道地域は干ばつによって飢饉がひどかった。淸の場合戦争地域が自然災害(洪水)地域と重なったり隣接していて、民衆の苦痛は倍になった。奉天省地域では数十万の餓えた民衆がさまよい、道端には飢え死にした死体が並んでいた。また戦争地域だけでなく福建․廣東地域も米不足で民衆が騒いでいたのだが、これは淸政府の‘禁米出洋’政策のためであった。この様な状況下で20万を越えた日本軍人と軍夫が攻めて来たので、物価どころでなく物資が底をついてしまった。 略奪․放火․强姦․虐殺の実情を見てみよう。朝鮮に入ってきた淸兵は牙山戦闘と平壌戦闘で負けて退却する途中でこのような野蛮行為を行い、清政府もこの様な事実を把握していた。特に衛汝貴が率いた盛軍の軍が最も秩序が乱れており、これによって衛汝貴は‘軍糧を奪い兵士を放した略奪行為’により処刑された。朝鮮に入ってきた日本軍の場合は、軍夫の犯罪行為がひどかったが、当時の軍夫の中にはヤクザ出身がかなり多かったようである。中国の民衆は日本軍だけでなく、自國の敗殘兵と土匪の被害を被った。しかし朝鮮と中国で日本兵と清兵の略奪がひどかったのは、戦争当事国が全ての食糧や馬の餌など軍需物資を準備しないまま戦争を始めたという点に原因があるといえる。その次に、準備した軍需物資の調達速度が軍隊の進軍速度についていけず、兵士が腹をすかす状況が頻繁に起こったためである。両国の軍隊が放火を行ったが、淸軍の場合は堅壁淸野の目的で行った場合が多く、日本軍の場合は民家に隠れた敗残兵を一掃できず市街地に火をつけて焼け野原にした。日本軍はまた捕虜を引きずり歩き、監視しなければならない面倒さを楽しむために降伏した敗残兵も全て虐殺した。 日清戦争当時、戦争地域では赤痢、マラリア、コレラ、腸チフス、痘瘡、性病などが流行した。朝鮮では平壌戦闘直後赤痢が大流行し、他の地域の伝染病に比べて患者が最も多かった。これは9月の暑さと暴雨の中で、2500を越える死体が放置されたことが原因である。コレラは満州の金州地域で1895年3月頃発生した。冬の間満州の原野の雪の中に埋もれていた死体が、春になって雪が解けて衛生上での問題が起こったものと推論される。コレラは一方では義州を経て韓半島全域に広がって朝鮮人30万人が命を落とし、他方では海から澎湖列島․台湾․日本などに広まった。一方戦争当時日本軍の中で広まった性病の実状を見ると、1894年6月から1895年12月まで性病によって入院した患者が2,416人である。性病とは他の病気と違って隠す病気という点、そして軽い症状なら単純な通院で治る病気である点などを考えると、戦争中に‘入院患者’の数がこの程度であるならば、実際性病を経験した患者がどのくらいなのか我々の想像をはるかに越えるだろう。日本の野戰衛生長官が大本營に上げた意見書には、公娼を許可してこれにより性病検査を徹底することしか対策はないとある。これ以外にも野戰衛生長官が提示した性病予防対策の内容は、太平洋戦争当時日本が推進した‘従軍慰安婦’政策と相互連結するものであった。 戦争地域の民衆の精神的苦痛に目を向けてみよう。朝鮮の民衆は日本側の徴発にも応じなければならず、同時に中国側の徴発にも応じ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かし日本側の徴発に応じるとき、時には東学運動勢力や反日抵抗勢力による命の危険を感じることもあった。しかしさらに悲劇であるのは平壌戦闘当時、力のない朝鮮政府は淸․日両国の支援兵要請に屈服して両国に朝鮮兵士を派兵し、その結果朝鮮民衆は同族同士で戦わなければならない悲惨な状況となり、精神的苦痛を抱え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点である。 淸の民衆もやはり精神的な葛藤を覚えずにはいられなかった。日本は占領地域に行政廳を設置して、帰服した家にだけ‘大日本順民’と書かれた標札を与えて保護を約束した。このようにして隣近所でも帰服したかしないかで相互対立する状況となった。また日本は中国人を買収したり拉致してスパイとして投入し、これを捕まえるために中国政府が懸賞金をかけると、中国人同士がお互い申告して1000人以上が犠牲となった。結局同じ民族同士がお互い疑って殺害するところにまで陥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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