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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日戰爭 初期 朝日盟約의 강제 체결과 일본의 군사침략

Forced signing of 'Joseon-Japan alliance(朝日同盟)' and Japan's military invasion in the early years of Sino-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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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분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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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을 지나는 시점에서 한・중・일 동북아 삼국은 역사논쟁의 차원을 넘어 역사전쟁으로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고 있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일어난 전쟁이다.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6개월간의 전투를 승리하고, 청나라는 위해위를 포함한 많은 지역을 잃고 1895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청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전통적인 국제질서와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전쟁의 충돌이 전면전의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조선이 청의 종속체계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수립하고 자주적인 국가발전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으로 실패하고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체제로 전환되었으며, 서구 열강의 묵인하에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이 강화됐다. 청일전쟁은 실질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청군파병 요구논의가 있었다. 청군파병이 결정되고 청군의 파병을 빌미로 일본군이 출병하여 동학농민혁명과 상관없이 서울로 진입하여 조선정부를 위협했다. 일본군은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국왕의 신변을 확보하여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조선으로 하여금 청군철수 의뢰를 강제했지만, 조선정부가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차질이 초래됐다. 경복궁 점령과정에 조선군의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일본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조선군은 18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군제개편을 통해 군사력을 확보하려고 하였지만, 예산문【국문초록】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을 지나는 시점에서 한・중・일 동북아 삼국은 역사논쟁의 차원을 넘어 역사전쟁으로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고 있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일어난 전쟁이다.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6개월간의 전투를 승리하고, 청나라는 위해위를 포함한 많은 지역을 잃고 1895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청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전통적인 국제질서와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전쟁의 충돌이 전면전의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조선이 청의 종속체계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수립하고 자주적인 국가발전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으로 실패하고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체제로 전환되었으며, 서구 열강의 묵인하에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이 강화됐다. 청일전쟁은 실질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청군파병 요구논의가 있었다. 청군파병이 결정되고 청군의 파병을 빌미로 일본군이 출병하여 동학농민혁명과 상관없이 서울로 진입하여 조선정부를 위협했다. 일본군은 불법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국왕의 신변을 확보하여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조선으로 하여금 청군철수 의뢰를 강제했지만, 조선정부가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차질이 초래됐다. 경복궁 점령과정에 조선군의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일본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조선군은 18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군제개편을 통해 군사력을 확보하려고 하였지만, 예산문제, 청군과 일본군에 의한 교육・훈련시키는 등 문제로 체계적이지 못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작전시 평양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이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흩어졌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무장해제시켜 내부적인 반발을 제거한 뒤, 청일전쟁의 개전빌미를 마련하고자 조선이 일본에 청군의 축출을 의뢰하도록 강요했지만, 조선은 강력하게 거부했다. 경복궁 점령직후 주력부대를 조선에 진주한 청군과 전투를 위해 남진시켰던 일본군은 곤란에 처했다. 조선인의 비우호적인 태도로 인해 전투식량 및 보급에 차질이 초래됐다. 강제징발과 고전 끝에 겨우 성환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안정적으로 조선을 정치, 군사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친일내각을 수립하고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했다. ‘조일잠정합동조관’을 통해 정치적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을 강요하고 군사적으로 군용전선을 가설하며, 경복궁 강제점령의 비합법성을 마무리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경복궁 안에서 일본군의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은 조선과 ‘조일군사동맹’ 등을 체결했다. ‘조일군사동맹’은 조선을 청일전쟁의 보급기지 및 배후지로 전락시켰으며, 철저하게 일본군의 군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제 체결됐다. 고종과 정부는 조선군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과 발전적인 강화방안은 부재한 상황에서 청군과 일본군에 대한 안일한 인식을 하여 일본에 의한 조선의 군사강제 및 식민화의 단초를 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임하면서 대본영을 설치하고 복잡한 국내상황과 군사적 문제를 고려하여 철저하게 조선침략계획을 수립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국가운명을 좌우할 중대사임에도 불구하고 육・해군의 고질적인 불화와 정치와 군사의 불화가 존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육・해군을 일원적으로 지휘・통제할 필요가 있었으며, 政略과 戰略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군정과 군령의 불명확한 구분을 해결하기 위해 대본영을 설치하고 청일전쟁의 최고 지휘부로 운영했다. 일본에 있어 청일전쟁의 실질적인 목적은 청을 패전시켜 점령하기보다는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켜 일본이 전면적으로 장악함에 있었다. 이를 위해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청군과 전쟁을 치루기 위해 일본의 모든 전력을 투입했다. 일본의 조선출병으로 실질적인 청일전쟁은 시작됐으며, 일본군은 경복궁 불법 점령 및 조일동맹의 체결을 통해 조선을 군사배후지로 전략시켰다. 또한, 전쟁과정에서 철저하게 조선을 군사적으로 침략하여 이후 일제강점에 이르는 시발점으로 삼았다.

Abstract

Korea, China and Japan were repeat the conflict and confrontation beyond a history of controversy in the 120th anniversary of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淸日戰爭). The Sino-Japanese War was fought between Qing dynasty and Japan, primarily over control of Joseon. After more than six months of unbroken successes by the Japanese land and naval forces and the loss of the Chinese port of Weihaiwei(威海衛), the Qing leadership sued for peace in February 1895. Chinese centered East Asian traditional international order and Japan militarism's aggressive war's collision was due to The Sino-Japanese war, came to light aspects of a full-scale war. Joseon tried to escape from Ching's subordination system and to built an independent country. But Joseon's try was end in failure under Japan's coercion, and switch over to Japan's real governance by Western power's connivance. After GapsinCoup(甲申政變) in Joseon, Japan started to think Qing in all as a potential enemies and to strengthen the military power, especially naval forces. When Donhak Peasant War(東學農民戰爭) was break out, the Japanese government decided that the Japanese army(a 9th mixed brigade) was dispatched to the territory of Joseon. Japanese army occupied Gyeongbokgung(景福宮) and hold king Ko-jong(高宗) as a hostage, and Japanese government made the pro-Japanese party take power to reform of Joseon's domestic political systems. After the Japanese army removed internal resistance by disarm Joseon army, in order to make a cause of the outbreak of Sino-Japanese war, wanted receive a drive out request against Qing's army. But at first, Joseon roundly rejected the offer. Immediately after the occupation of Gyeongbokgung, the Japanese army advanced south his the main forces, but the Japanese army in a difficult situation. The Japanese army's battle supply was in trouble because Joseon peoples did not help. The Japanese army that put in a requisition and won only a bitter fight in battle of Seonghwan(成歡戰鬪), established pro-Japanese cabinet and make ‘an Joseon-Japan tentatively cooperation article(朝日暫定合同條款)’ for a stable political and military control. Japan demanded reforming Joseon internal affairs and put up military purpose wire and received an exemption of illegal occupation of Gyeongbokgung through ‘an Joseon-Japan tentatively cooperation article’. After, in order to carry out the Sino-Japanese war, the Japanese army concluded ‘Joseon-Japan alliance(朝日同盟)’ conditional on Japanese army withdrew in the Gyeongbokgung. ‘Joseon-Japan alliance’ was reduced Joseon to fall hinterland to and supply base of the Sino-Japanese War and was signed in order to achieve Japan military purpose. The deployment of Japan's military forces to Joseon is thoroughly prepared beforehand according to the elaborated plan and they started a war, and consequently had forcibly occupied the Joseon dynasty. Actually, the Sino-Japanese War had begun for the dispatch of the Japanese army, and Joseon fell into a military hinterland through illegal occupation of Gyeongbokgung, establish pro-Japanese cabinet, make ‘an Joseon-Japan tentatively cooperation article’, and conclud ‘Joseon-Japan alliance’. To conclude, Japan invaded Joseon in the name of the Sino-Japanese War and start point of Japanese occup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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