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광복군 북경에서의 활동
韩国光复军在北京的活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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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광복군 성립 이후 각 지대가 북경에서 전개한 초모활동을 주로 회고록을 통해 추구하고 해방 직후 광복군 각 세력의 확군활동의 실상을 규명했으며, 광복군 주평판사처의 조직과 활동 및 광복군의 귀국 경위를 살펴보았다. 해방 이전부터 광복군은 북경을 주요 활동무대를 삼아 거점을 구축하는데 힘을기울었다. 제2지대와 제3지대가 북경에 진출하여 한인 청년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해방 직전까지 북경지역의 한인 광복군 대원은 약 300명에 달했다. 초모활동은 지대원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일본군내의 한적사병이나 일반 한인 청년을모집하여 지대본부로 보내어 훈련을 받은 후 다시 북경으로 파견하여 초모활동을전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회고 자료상으로 볼 때 특히 제3지대의 활약은 돋보였다. 제3지대가 북경에서 초모한 김지옥, 김광언 등 및 제3지대 본부에서 파견된 조성산은 해방 이후 북경의 광복군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광복군의 초모활동은 각종 성격의 한인들을 북경에서 탈출시킴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에 충격을 주었다. 해방 직후 각지에서 북경으로 퇴각한 한인들은 광복군에 편입되었고 대원은1,300여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경에서 광복군의 조직과 활동은 가타지역보다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이는 해방 이후 혼란에 빠진 북경정세에 따른 북경한인사회의 불안정함과 임시정부의 통일적인 통제의 부재함에 기인된 것이다. 조성산은 스스로 임시정부 주화북대표부와 광복군을 조직하였고, 제2지대와 제3지대도 각각 군대확장에 나섰다. 특히 광복군 제3지대는 ‘군정식’ 정책을 실시하여북경 한인으로부터 불만을 샀다. 그리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단체통합의 명분으로 북경 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단체 華北韓僑指導委員會와 공산주의계열의단체인 흥한단을 강제 해체시키려고 했다. 제3지대의 무리한 확군활동으로 인해광복군은 북경한인사회에서 혹평을 받게 되었다. 1945년 11월 중순에 들어 임시정부가 화북선무단과 광복군 주화북판사처, 즉주평판사처를 설치하면서 이러한 혼란 국면은 정돈되었다. 광복군 주평판사처 제2지대와 제3지대를 통합시키고 광복군 북평잠편지대를 편성하였다. 광복군 주평판사처가 성립된 후 북경당국으로부터 잠시 허가를 받았으나 활동은 제한적이었다. 북경당국의 요구에 따라 警衛隊를 糾察組로 바꾸었고, 무장이 해제되었고 무기와탄알은 몰수당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광복군 주평판사처는 화북지역 한인청소년의 훈련을 담당하였다. 광복군 주평판사처의 대원은 주로 해방 후 일본군에서 제대한 한적사병이나 군속으로 편성되었고, 그 규모는 간부를 포함하여 약 200명이었다. 하지만 1945년 12월 말부터 국민당정부는 광복군의 확군활동을 금지시키는 정책을 세웠다. 국민당정부의 금지방침에도 불구하고 주평판사처가 확군운동을 강행했지만, 경제난 등 원인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북경의 광복군인들은 미군정과 국민당정부의 정책에 따라 일반 한인의 신분으로 1946년 4월말 경 귀국하였다.
Abstract
本文探讨了韩国光复军成立后各支队在北京开展的招募活动,二战之后韩国光复军各势力的扩军运动,并阐明了光复军驻平办事处的组织和活动以及返回韩国的经纬。早在二战结束以前,韩国光复军就把北京作为主要活动舞台,努力构筑活动根据地,二战结束前为止,北京的韩国光复军队员数达到300人左右。第2支队和第3支队都进入北京,开展招募韩人青年活动。招募活动主要采取的方式是,派遣队员深入北京,在日本军队内召集韩籍士兵或一般韩人青年,送往支队本部,在本部接受训练后,再派往北京开展招募活动。根据光复军人的回忆录内容,第3支队的招募活动比第2支队活跃。第3支队在北京招募的金址玉,金光彦等人,以及从第3支队本部派到北京的赵城山,二战后在北京的光复军中起到主导作用。在光复军招募活动的影响下,北京各种性格的韩人脱离北京,动摇了日本在北京对韩人的殖民统治。二战之后,随着从各地退到北京的韩人的增加,北京的光复军队员数也随之增加到1千300多人,但在北京的光复军的组织及其活动比其他地区复杂。这主要是因为动荡的北京局势而陷入混乱的北京韩人社会以及缺少统一的大韩民国临时政府的统制的影响。赵城山任意组织临时政府代表部和光复军,第2、第3支队各自热衷于军队扩张活动。尤其是光复军第3支队采取“军政式”管理政策,引起众多北京韩人的不满。而且为了抢夺主导权,以统一各团体的名义,强制解散其他团体,代表团体是唯一得到北京当局认可的华北韩侨指导委员会和共产主义性格的团体“兴韩团”,因此,第3支队的过分的扩军活动,导致北京韩人社会对光复军的不信任。进入1945年11月中旬,临时政府设置华北宣抚团和韩国光复军驻平办事处,并着手整顿韩人社会的混乱局面。光复军驻平办事处统一了第2、第3支队,并把队员编入新设的光复军北平暂编支队。光复军驻平办事处在成立后向北京当局提交批准申请,北京当局在进行调查后暂准其成立。但光复军驻平办事处的活动并不顺利,因为当时国名党政府改变对韩国光复军支持的态度,制定了限制韩国光复军的规定。在北京当局的要求下,光复军驻平办事处把警卫队改为纠察组,解除武装,武器弹药被没收。在这样困难的环境下,韩国光复军驻平办事处负责对华北地区韩人青少年的训练。队员主要是由从日本军退伍的韩籍士兵或军属。北京地区韩国光复军的规模大约有200名。从1945年12月末开始,国民党政府制定了禁止韩国光复军扩军活动的政策,光复军驻平办事处虽然继续开展扩军运动,但由于资金短缺等原因,没有获得显著效果。最后,北京的韩国光复军遵守美军政和国民党政府的政策,以一般韩人的身份,在1946年4月末回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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